우리 교육현장을 진단 한다
문제 제기
「20세기의 선생이 19세기의 교실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1)는 말이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을 한 마디로 풍자하기에 걸맞은 표현으로 보기에 주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사실이 그렇다. 교사들은 스스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교수활동을 위한 아무런 권한이나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 단순기능인 내지 말단공무원으로 전락해 버렸고, 교실은 낡을 대로 낡은데다가 콩나물시루에 백묵 하나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양음악과 춤에 취하여 미제·일제 프로그램의 오락기 단추를 눌러대면서 입시라는 굴레에 매달려 바둥거리고 있는 현실이다.
사태는 이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교육활동 및 그 결과는 당장 눈에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한 민족의 역사적인 현실이자 문화적인 축적이며 또한 정치·경제의 한 실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교무실을 직접 방문해본 학부형이나 친구들은 한결같이 놀라면서 묻는 말이 있다. 「어떻게 학교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이 동사무소 보다 못하냐?」는 것이다.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학부모는 자식들의 요구에 무한 책임을 지고 있을 뿐, 당당한 교육주체로서의 권리를 저당 잡힌 채 교육재정의 심각성에 대해 감지해내지도 못하고 학생들과 교사와 함께 소외된 채 피해자로 전락되어온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땅히 교육의 주인이 되어야 할 교사·학생·학부모가 설 자리에 유령처럼 누가 앉아서 군림하고 있는가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영원한 미궁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교육현실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고의적인 왜곡이나 오도뿐만 아니라, 오늘날 제 3세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에서 보듯이 국제적인 이해관계나 보이지 않는 음모에 의해서도 문제의 핵심을 크게 벗어나 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교육문제만은 자신 있게 문제점을 지적해내면서도 아무도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의 말대로 한다면, 「당신이 문제해결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당신은 그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올해 들어와서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고심 끝에 발표한 과외금지 해제조치는 문교부장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라 민정당과 청와대 수뇌부의 최종 결단을 앵무새처럼 대변한 것에 불과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예에 불과하지만, 우리 교육현실에 덩어리지고 얽혀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대비·검토해보면 누구나 쉽게 원인이 되는 두 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국가독점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수권(守權) 이데올로기이다.
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규범으로서 민족·민주·통일교육을 상정하고자 할 때 이에 역행하는 최대의 장애요인은 이 두 개의 고질적인 이데올로기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고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하는 우리 교육현장의 문제들의 극복이 단지 교육내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경제적인 현실과 역사적인 미래를 올바로 인식하고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도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다 왜곡되고 오도된 그대로 투영된 이 땅의 교육현장이 바로 우리 시대의,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2. 일제잔재의 뿌리
일제잔재의 상징으로 흔히 지적되어 오던 교복 및 두발이 83학년도에 전면적으로 자율화되면서 일제잔재의 뿌리와 전체주의적 폐습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율화는 자율화대로 근본적인 교육의 양태가 자율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신의 안녕을 위해 민족의 양심을 배반하고 황국신민화 교육에 앞장섰던 친일교육자들이 해방 후의 혼란한 공백을 틈타 그대로 해방된 조국의 교육계에 요직으로 옮겨 앉은 실상은 해방민족의 벽두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오늘날까지 독재정권의 시녀로 전락해 올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고리를 이어온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이 일제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에 뿌리째 젖어있던 사람들이 다시 미국과 손잡고 자유당과 결탁하여 해방 교육계의 초석을 놓고, 마스터플랜을 짜고, 학교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결국 일제의 기초에다 미국식 벽돌을 엉성하게 얽어놓아 지금도 그대로 그 골격과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교육의 실상인 것이다.
교육정책은 그것이 곧 정치 및 통치이념과 직결되는 하나의 주체적인 도구로서 교육전반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교육행정과 그 담당기관들도 고유의 자율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채 하나의 통제체제로만 남아있는 현실이다. 결국은 모든 것은 그대로인 채, 내용만 바뀐 꼴이 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지 않게 학생들에게 크게 작용하는 것은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교수내용일 것이다. 이는 흔히 무심코 전수되고 전수받는 것이지만, 그만큼 근본적으로 의식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큰 것이다. 국책과목 뿐만 아니라, 모든 교과서마다 체제유지 이데올로기가 비린내처럼 덕지덕지 묻어있는 채로 가르치지 않고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으면, 교장은 즉각 문제교사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함께 오늘날 우리교육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인 과도한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인문계 선호경향도 일제의 식민유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물론 이조 조선시대의 흔적이랄 수도 있겠지만, 우리와 같이 병적인 인문계 편향은 식민시대를 거친 제 3세계 국가들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식민지배 전략의 한 소산인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까지 그대로 재현되고 거기에 재벌의 딸까지 구색을 갖춰 매스컴에 드라마화 됨으로써 학생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이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고교생들의 직업선호는 권력형 입신양명에서 경제형·과학형 안정 추세로 다양하게 진행됨으로써 자본주의 수권적인 경향을 점차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두가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다. 4~5명 중 1명밖에 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대학 진학에 실패하거나 포기한 많은 인문계 고교출신의 고등인력이 실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식민지적 드라마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3. 입시교육의 병폐
입시철에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입시현장 풍속도는 007 영화를 방불케 할 뿐 아니라, 언론이 이를 생중계하다시피 부추기고 있으니, 이 대열에 소외되어 있는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이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자신이 못 이루면 자손대대로 물려가며 대학 못가면 큰일이라며 모든 것을 걸고 아우성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보이지 않게 지탱하고 멍들어가게 하는 자본주의 수권적인 경쟁의 원리, 선발의 원리가 그대로 교육현실에 전이되어 입시경쟁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회와 기업은 명문대학의 졸업장을 요구하며 그것으로 사람을 가려 뽑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신식민주의 제 3세계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종속적이고도 왜곡된 경제의 구조적인 메카니즘으로서 농촌은 농촌대로 피폐되었고, 인구는 끊임없이 도시로 집중되었으며, 과도한 3차 산업의 고용증대를 가져왔다. 이 경우,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단순노동에 종사하거나, 학업을 계속할 경우에는 제한된 3차 산업의 직장을 두고 끝없는 사다리의 상승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학력과 명문의 선발기준은 중요한 작용을 하며, 과도한 경쟁원리로서 대입경쟁을 부채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새로 부상하는 중산층의 불만과 위화감을 무마시키고 정치적 압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보편적인 대중교육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고 비용이 보다 많이 드는 고등교육을 확장시켜 나간다. 따라서 그 나라 경제의 공업화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심화시키는 중등 및 고등교육의 일환으로 과잉교육이 이루어지며 실업은 실업대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의 많은 문제들의 책임이 경영의 부실, 제도운영의 비능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교육활동에 절대적인 특별활동의 경우도 형식치레에 불과하여 3학년의 경우 아예 그 시간이 수업시간으로 돌려지는 것도 당연한 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중학교 1,2학년까지도 만연되어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대학입시라는 절대명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공자, 맹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땅의 대학입시 앞에서만은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4. 맺음말
지면관계로 교육과정과 평준화와 비평준화 및 고교입시 부활문제, 교권침해 등의 교육현장의 문제점들은 또 한 번 깊이 있게 논의되어야 할 아쉬움을 남긴 채 일단 마무리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으시기 바란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면서도 교사들은 수많은 통제를 받으면서 무력감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5년 「민중교육」지 필화사건과 86년 「교육민주화 선언」을 계기로 35만여 교육현장의 교사들은 드디어 무력의 늪에서 헤어나 참교육의 기치를 들고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87년 9월 27일에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되고, 87년 11월 27일에는 이 지역 안동에서도 「안동교사협의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안동여중 손원선, 서재관 두 교사와 교장과의 끝없는 싸움은 교사들에게 「국가독점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깨우치는데 충분하였으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안동공고 평교사회」 교사들의 참교육을 위한 「백암재단」과의 싸움은 「자본수권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향토 안동에서 이러한 두 가지 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땅의 교육현장의 열악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교육운동가이자 시인인 김진경 선생의 시에서 「가르치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의 참뜻을 깨닫고 지금도 안동지역의 많은 선생님들이 참교육을 하고자 단식하고 있는 교사들을 돈만으로 매도하는 「백암재단」과 싸우고 있음을 보면서 이 지역 학부모·학생들과 함께 이 땅에 참교육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새봄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해본다.
1) 라파엘 이리찌리, 「제 3세계의 과잉교육과 실업」,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 이규화·강순원 편 창작과비평사, 1984.
김헌택(안동교사협의회 교권부장)
※ 안동대신문 제 113호(1989년 3월 2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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