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5일 안동에서 문화회관이 사라지던 날, 내게는 아쉬움이 참 컸다. 이곳은 숱한 강연, 단체모임과 집회장소, 숙식이 함께 해결되는 문화공간으로 경북북부지역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민주화의 열망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과 운동 단체들에게는 거의 성지와 같은 이곳이 역사 속으로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화회관과 함께 해온 많은 날들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77년 2월이었던가 보다. 재수를 각오하고 대학등록 서류를 들고 포항 청하에 있는 친구(상윤)집을 거쳐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경 형(고교 문예반 선배)을 찾아 처음 안동에 왔던 그날 밤, 형이 불편한 다리를 절며 문화회관 '문화다방'까지 가서 차 한잔 사 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84년 대학 졸업 후, 경덕 중학교에 부임해 '안동문화연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 나와 문화회관과의 인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매달 발표회와 답사에 정이 들어 문화회관 드나들기를 내 집처럼 해온 지도 어언 17년이 지났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문화회관에서 내가 직·간접으로 관여해온 일들이 너무 많아서 기억나는 일들만 쓰기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풍산 중대사 보윤(지금은 대구 동화사 승가대학 강주로서 법명이 해월로 바뀌었음)스님의 요청으로 소설가 이문열, 시인 이하석 초청 강연을 비롯한 공옥진 여사의 공연을 유치했던 기억도 난다. 이곳에서 수많은 분들을 만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강연회를 마치고 근처 '할매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취해서 구두를 신고 나오는데, 선생께서 "구두가 바뀌지 않았느냐"고 묻는데도 고개를 흔들며 집에 돌아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뿔싸" 문화회관에 달려가 주무시는 선생님께 정중히 사과하고 왔던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얼굴이 뜨겁다. '안동문화연구회'의 회장 서주석 선생님의 열정과 달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쯤 문화회관 뒷집에는 오일창 선생님이 살고 계셨는데, 어느 핸가 오 선생 댁에 봉화의 전우익 선생께서 수해를 입은 남한을 돕기 위해 북한에서 보내온 쌀을 가져오셨다. 한 끼 밥을 해서 함께 먹고 나서 쓴 안도현 시인의 시가 한 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오 선생님이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한겨레 나눔 운동'으로 북한을 돕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문화회관에서 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문화 연구회'를 결성하여 함께 열심히 공부하던 때가 그립다. 85년 6월에 김대성 선생님을 중심으로 열 다섯 여명의 초 중 고 교사들이 '안동 YMCA 교사회'를 창립하여 86년 '교육 민주화 선언'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아오다가 결국에는 김대성 선생님이 경덕 중학교에서 해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안 중학교에 복직을 하면서 안동에서의 교육 민주화 운동도 본격화되어 갔다. 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시작은 언제나 문화회관에서였다. 학교에서 퇴근하고 달려나와 시위대열에 함께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화회관에서 시작된 '열린 영상회'도 잊을 수 없다. 왜관 '분도 수도원'에서 세바스찬 수사님이 정기적으로 가져오신 필름으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에 새롭게 눈을 떴다. 특히 '찰리 채플린' 시리즈 영화는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심지어 북한 영화 '이준 열사'를 마리스타 학생회관 옥탑방에서 담뇨로 창을 가리고 숨죽이며 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화회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더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마리스타 학생회관은 나를 비롯한 소위 운동권으로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자유로운 곳이었다. 87년 11월 27일은 참으로 통쾌한 쾌거를 이룬 날이었다.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비디오를 상영하는 동안 교육 및 경찰 당국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3층 동부동 성당에서 전교조 경북지부의 모태가 된 '안동 교사 협의회'를 전격적으로 창립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이 안동 MBC 뉴스를 통해 방송되었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던 많은 교사들 속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고만 '배주영' 선생님과 '정영상' 선생님이 있었다. 당시 정일 신부님의 도움이 참으로 컸다. 88년 '한겨레신문'이 태어나면서 문화회관에서 전국 유명인사들의 강연이 부쩍 늘어났다. 89년 '전교조'가 결성되고 초대 윤영규 위원장을 비롯한 역대 전교조 위원장들도 빠짐없이 문화회관을 찾았다. 91년에 전교조 경북지부가 대구에서 안동으로 옮겨오면서 '전교조' 관련 강연회와 집회 행사도 참으로 많았다. 성교육 강사로 유명한 구성애 선생 강연도 문화회관에서 한 두 차례 있었는데, 그때에는 50명의 사람들을 모으기에도 상당히 힘이 들었다. 전교조 부산지부의 '안동문화 기행' 답사에 500여명이 대거 참여해서 문화회관에서 숙식을 하기도 했다. 제 1회 전교조 경북지부 '참교육 실천 연구 발표 대회'가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교육 관료들이 현장교사들보다 더 많이 참석해서 경청(?)하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내가 조영옥 지부장을 대신해서 대회사를 하면서 교육 관료들의 맹성을 촉구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참교육 학부모회' 안동지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경북북부지역 시민연대, '2000 총선' 안동연대와 열린 사회를 위한 안동 시민연대와 같은 시민운동 단체들도 문화회관에서 창립되고 이곳에서 꾸준히 모임을 가져왔는데, '가톨릭 회관'으로 간판을 바꿔 단 이곳이 시민운동 단체들의 아늑한 보금자리 역할을 계속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바램만은 아니리라 믿는다. 필자의 아둔으로 채 언급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은 애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기며 너그러운 용서를 바랄 뿐이다. <사랑방 안동 73호에 게재했던 글을 옮겨 싣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