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원처럼 화려하거나 일본 정원처럼 섬세함을 추구했더라면 한국 정원도 조금 더 빨리 세계에 알려졌을지 모른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며 몸을 낮추는 한국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한국 전통정원은 이제야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전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의 한 유명 일간지에서는 한국 전통정원을 일컬어 아직 깨지 않은‘잠자는 거인’이라 평했다. 대체 무엇이 우리보다 화려한 정원 문화를 가진 서양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일까.
- 뒷동산마저 정원이 되는 곳
창덕궁 뒤편, 산자락 속에 조성한 창덕궁 후원(後園)은 한국 전통 정원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왕궁의 정원이지만 인공적으로 깎고 다듬은 흔적은 많지 않다. 그 대신 자연 지형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예부터 한국에서는 정원을 안마당이 아닌 뒤뜰에 만들었는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선조들은 뒷동산과 연결된 경사지에 계단식 축대를 쌓고 화초를 심었다. 그러면 뒷산은 그대로 정원의 한 부분이 된다. 창덕궁 후원 역시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 내린 9만여 평의 넓은 산자락이 후원이 되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창덕궁 후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아담한 연못인 부용지가 눈에 들어온다.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 안에 작고 동그란 섬이있는 모양인데 여기서 네모난 연못은 땅을, 연못 속의 둥근섬은 하늘을 나타내 음양의 조화를 뜻한다. 다른 왕궁 연못에서도 네모난 연못이 발견되는데 이는 동양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부용지 남쪽에는 연못에 두 발을 담근 부용정이 있다. 작지만 오밀조밀한 변화가 있는 건축물의 구성이 꽤 인상적이다.
- 자연의 경치를 빌리다
창덕궁 후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경복궁으로 걸음을 옮긴다. 경회루와 향원정을 보기 위해서다.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난다는 뜻을 가진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대접하거나 공신을 위한 연회 장소였다. 그만큼 웅장하고 품격 있는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그런가 하면 경회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향원정은 물 한가운데 있는 정자로 제법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자연의 멋을 품은 이 건축물들을 보며 한국 전통 건축의 중요한 개념인‘차경(借景)’을 떠올린다. ‘차경’은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바깥 경치를 건물이나 정원 안으로 끌어와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차경의 미덕은 온전히 소유하고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즐기려는 자연 친화적인 태도에 있다. 이는 경회루나 향원정뿐 아니라 창덕궁 후원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정원들은 왕의 자리에서 보면 가장 아름답도록 설계되었다.
관광객들은 보통 멀리서 건물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건물 안, 특히 왕의 자리에서 밖을 바라보았을 때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경회루에서 왕의 자리는 누각 한가운데로, 이 자리에 앉으면 남산부터 인왕산,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아래로는 물에 비친 하늘과 산을 볼 수 있다.
‘차경’은 건물을 짓는 데 주변의 자연환경 따위는 고려치 않는 현 시대의 우리와는 다른 섬세하고 따뜻한 감각을 보여준다.
- 숨겨진 전통 정원을 찾아서
종로구와 성북구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한국 전통 정원을 찾는 일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다. 조선왕조의 도읍이었던 서울에는 한때 정자와 정원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가운데 옛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 바로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이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서울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한 석파정을 만날 수 있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얕은 계곡과 너럭바위가 있는 이곳 역시 주변의 산을 그대로 정원으로 품고 있다. 정원 안에선 신기하게도 외부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 고요하게 자연을 느낄 수 있다.
- 전통에 변화를 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화성에 있는 정용채 가옥이다. 집에 들어서니 확 트인 공간이 넉넉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 집을 지을때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 들어섰을 때 공간이 넓은 집이 좋다’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들은 이런 집을 ‘속 깊은 집’이라고 해 복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일까. 정용채 가옥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는 와중에도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집을 지을 당시 좌향으로 자리를 앉혔기 때문에, 50칸이 넘는 큰 집이지만 대문 밖에서 보면 집의 한쪽만 보여 작은 집처럼 보인다. 무턱대고 크기를 키우지 않고 주변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한 점이 한국 전통 정원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
남양주에 있는 여경구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가 정용채가옥과 비슷하지만 막상 집 안에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정용채 가옥이 완벽하게 ㅁ자 모양이라면 여경구 가옥의 경우 안채가 집안 깊숙이 ㄱ자형으로 자리 잡았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광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열린 ㅁ자형 구조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집은 안방과 사랑방이 마을을 향해 길게 배치되어 있고 직각으로 문간채와 중문채, 그리고 부엌이 놓여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보통 집들처럼 앞뒤로 놓지 않은 것은 전망 때문인데,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넓게 펼쳐진 들판까지 한눈에 보인다. 사랑채의 마당과 안채의 마당 모두 앞면이 트여 있어 집 안으로 마을 전경을 끌어온 것 같다. 안채 뒤쪽에 있는 화단을 보고 부엌 동쪽으로 향하면 조그만 뒤뜰이 나오는데, 그 뒤로 개울이 흐르는 울창한 숲을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전통 정원이 집의 안팎을 두르고 있는 셈이다.
- 조화와 순리의 미덕
한국 전통 정원을 따라 걸으며 가장 놀랐던 것은 우리 민족의 자연 친화적인 성품이었다. 인간의 힘을 더해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태도는 한국 전통 정원의 핵심이었는지 모른다.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 없이 조화로운 태도와 순리를 따르는 정원의 모습은 마음대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현대인의 욕망에 잔잔한 교훈을 주는 듯하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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