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열 번째 이야기 길 - 신의 정원 - 조선 왕릉

이산저산구름 2015. 8. 12. 11:53

 

 

2009년,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부터 당대의 건축 양식과 미의식, 생태관과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화의 결정체라는 점을 인정받은 일이었다. 유럽의 정원 건축가들이 ‘신의 정원’이라 극찬했던 조선 왕릉, 그 신비로운 숲에서 500년 조선왕조를 만나본다.

 

 

- 500년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

 

500년 조선왕조가 잠들어 있는 곳. 조선 왕릉은 단순히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처럼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왕조의 역사가 담긴 무덤이 고스란히 보존된 곳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숲과 무덤, 홍살문과 정자각 등이 어우러진 모습은 가히 ‘신의 정원’이라 불릴 만하다.

 


- 조선 왕릉을 만나기 전

 

조선 왕릉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면 제일 먼저 들러야 할곳은 조선왕릉전시관이 있는 태릉과 강릉이다. 전시관을 돌아보면 조선 왕릉의 배치부터 제례 의식, 각 왕릉에 얽혀 있는 이야기까지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왕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물과 국장(國葬)을 재현한 모형들은 낯설게만 느꼈던 조선 왕릉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태릉과 강릉은 전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문정왕후(1501~1565)의 능인 태릉은 왕비의 묘임에도 그 규모와 화려함이 왕릉 못지않다. 즉위 당시 12살이었던 명종을 대신해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가 느껴진다.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겠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탁월한 정치가가 아닐까. 그 웅장한 규모 때문인지 태릉에는 금은보화가 많다는 소문이 돌아 임진왜란때 왜적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 아홉 개의 능을 만나는 곳, 동구릉

 

 

다음으로 찾은 곳은 가장 많은 조선 왕릉이 모여 있는 동구릉이다.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곳에는 아홉 기의 능이 모여 있는데, 너른 숲을 둘러보며 모든 능을 살피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걷다 보니 처음에는 비슷하게만 보이던 왕릉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닮음안에 숨겨진 다름 속에 무덤 주인의 삶과 조선의 역사가 담겨있었다. 조선 왕릉이 중요한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왕릉의 아름다운 모습뿐 아니라 이렇게 숨겨진 과거를 불러내는 힘이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수지리와 유교적 전통을 충실하게 따랐던 조선에서 왕릉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부터 꽤 까다로운 일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지관(地官)들이 심혈을 기울여 왕릉의 위치를 정했다. 당시엔 왕릉의 위치가 나라의 미래와도 연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릉이 들어설 곳은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면서 민가와 구분되는 신성한 곳이어야 했다. 왕의 행차를 고려해 한양에서 멀지 않은 장소여야 했음은 물론이다.


 

- 왕릉에 스며든 이야기

 

동구릉의 깊숙한 곳, 태조가 묻혀 있는 건원릉이 바로 그런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풍수학자들뿐 아니라 명나라 사신까지도 주변과 잘 어우러진 건원릉을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건원릉에 들어서면 주변이 모두 보이는 높은 지역인데도 어딘가 따사롭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 숲과 능 앞으로 탁 트인 경관 역시 아름답다.
동구릉에 있는 아홉 기의 왕릉 중에서 가장 독특해 보인 곳은 헌종의 무덤인 경릉(景陵)이었다. 보통 왕이 세상을 떠나면 혼자 묻히거나 자신의 능호를 가진 능에 왕후와 함께 묻히는데, 헌종은 자신의 능을 따로 쓰지 못하고,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효현왕후 김씨의 무덤 옆에 묻혔다. 이후 헌종의 계비(繼妃)인 효정왕후까지 이곳에 함께 묻히며 왕·왕비·계비를 같은 곳에 모신, 조선 왕릉의 유일한 삼연릉(三連陵)이 되었는데, 이는 헌종과 철종 때 두 차례나 수렴청정을 했던 순원왕후와 그녀의 친정이었던 안동 김씨의 권세를 보여준다.
헌종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능호를 지닌 능조차 갖지 못하고 안동 김씨 가문이었던 효현왕후의 능에 함께 묻힌 것이다. 왕릉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과거 왕실과 조정의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 조선왕조의 마지막 능

 

 

동구릉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홍릉과 유릉은 고종과 순종의 무덤이다. 이 두 능은 과거 왕릉과는 그 형태가 다른데,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이 아닌 황제릉의 양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제의식이 이루어지던 정자각은 다른 왕릉과 달리 정(丁)자가 아닌 일(一)자 모양이고, 무덤 옆에 세워졌던 동물 형상의 석물을 정자각 앞에 세운 것도 이전의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게다가 석물들은 양이나 호랑이가 아닌 기린, 코끼리, 사자, 낙타 모양이다. 타국의 동물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존의 조선왕릉과 황제의 능 사이의 간극이 새삼 느껴졌다.

 


- 경릉으로 조선 사회를 엿보다

 

궁궐 동쪽에 동구릉이 있다면 서쪽에는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다. 서오릉에는 5기, 서삼릉에는 3기의 능이 모여 있는데, 서오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곳은 헌종의 능과 같은 이름을 가진 덕종의 경릉(敬陵)이다. 합장을 하는 경우 보통 산에서 내려다볼 때 오른쪽에 왕을 왼쪽에 왕비를 묻는데, 경릉은 오히려 반대로 오른쪽에 왕비를 왼쪽에 왕을 묻었다. 게다가 왕비의 능은 왕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이유는 덕종이 세상을 떠날 당시 왕세자였기 때문이다. 소혜왕후는 대왕대비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지위가 더 높은 소혜왕후가 지금의 자리에 잠든 것이라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분과 그에 따른 예법을 철저하게 따졌던 조선시대, 아마도 대신들은 당시 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을 것이다.

 


- 빛나는 유산, 조선 왕릉

 

유네스코는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이유로 유교의 전통에서 시작된 독특한 건축과 조경 양식의 아름다움, 풍수지리사상, 제례의식을 통해 아직도 역사적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왕조의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하지만 조선 왕릉은 그 외에도 많은 의미가 있다. 왕릉에서 드러나는 유교의 예법을 통해 조선을 관통하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무덤을 조성한 지역이나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각 시기의 역사 · 정치적 상황, 문화적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왕릉 주변에 있는 석물과 배치 양식의 변화를 통해 그 시기 미학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까지, 조선 왕릉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조선왕조 500년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길잡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