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조선과 과학은 어울리지 않는 짝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관측기구를 만들어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지구가 둥글며 자전한다고 주장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홍대용, 정약용,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가 바로 그들이다. 조선 땅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교육받은 이들은 근대과학을 어떻게 이해했던걸까? 조선시대의 과학자들이 남긴 유물들을 따라 걸으며 해답을 구해본다.
- 다산길을 따라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양주 조산면.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능내역과 길게 이어지는 철길, 연꽃이 화려하게 핀 연못을 곁에 두고 길을 걷는다.
산과 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곳은 조선 말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덕분에 주위에는 정약용과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아 길 이름 역시 다산길로 붙여졌다. 유적지로 가는 길에서 먼저 마재성지를 만난다. 이곳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천주실의』를 읽으며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한 곳이다. 유능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정약용은 후에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소담하고 아기자기한 마재성지를 지나 다산유적지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과 다산 선생의 묘, 다산기념관, 실학박물관이 모두 함께 자리하고 있어 다산의 여러면모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다산 하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사회개혁가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거중기를 만들고, 수학책과 의서를 집필한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 두 과학자, 정약용과 홍대용을 만나다
당시 조선의 과학자들은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천문학과 지구의 자전 문제, 둥근 지구에 대해 이해하려 했고, 이를 위해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정약용 역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종래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지구는 둥글고 자전하며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었지만 정약용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시 풀어냈다.
실학박물관 3층에 있는 과학 전시관에서 또 한 명의 조선 과학자를 만난다. 바로 『의산문답』으로 유명한 홍대용이다. 조선 최초로 근대 천문학을 도입한 홍대용은 천문 관측기구를 직접 제작할 만큼 서양 근대과학에 매혹된 인물이었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둥글며, 하루에 한 번씩 돈다는 주장을 자신의 우주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통해 풀어낸다. 뿐만 아니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
정약용과 홍대용의 발자취를 좇다 보니 문득 우리의 전통 과학이 궁금해졌다. 서양의 신 문물을 만나기 전 우리나라에도 과학이라 부를 만한 게 있었을까?
그렇게 찾게 된 곳이 국립과천과학관이다. 이곳에는 전통과학만 다루는 별도의 전시관이 마련돼 있는데 여기서 발견한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다. 1396년(조선 태조 4년) 돌에 별자리를 새겨 만든 이 지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천문도다.
만들어진 과정도 하늘의 명에 따른 듯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노인이 ‘고구려 천문도’라는 탁본을 올렸다. 당시 태조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는 받았지만 아직 국왕으로서 책봉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는 이 천문도를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징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천문도를 돌에 새기게 한 것이다.
- 세종, 조선 과학의 빛나는 페이지를 쓰다
조선의 과학은 15세기 세종 때 최고의 꽃을 피웠다. 국가가 중심이 되어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구를 발명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시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격루와 앙부일구는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사람의 손 없이 저절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 자격루였다. 거대한 규모와 달리 섬세한 장치들이 당시 과학기술이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종에게 과학기술은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힘이었다. 세종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을 위해 강우량을 잴 수 있는 측우기를 발명하고, 경복궁과 창경궁에 풍기대를 놓아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찰하게 했다. 물론, 다리에 수표를 설치해 폭우에 의한 위험을 방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시기에는 천문학과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구분하고 날짜의 순서를 매기는 역법도 발전하는데, 세종은 서운관을 중심으로 천문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할 수 있게 했다. 당시의 천문대였던 간의대 주변에는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혼천의 등이 설치되었다. 당시 천문과 역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과학기술은 중국 역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 아니라, 한양 즉 서울을 표준으로 ‘칠정산’이라는 역법을 제작할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 호기심 가득한 과학자의 등장
세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조선의 과학사에는 별다른 큰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기보다는 세종 때의 발명품을 이어받아 활용했고 기구가 고장 나면 제대로 고치지 못해 방치하는 일도 있었다.
그 뒤 과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눈에 보일 만큼 커진 것은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에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관심으로 과학이 살아난다.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책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던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거리를 던져준 것이다.
- 조선 과학자가 만난 우주
현재 우리가 배우는 과학은 대부분 서양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것들이다. 그렇기에 과학이라고 하면 당연히 서구 중심의 근대과학을 떠올린다. 우리가 과학과 전통 사회를 멀찌감치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도, 전통적인 것은 비과학적이고 근대와 전통은 대립한다는 생각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텐베르크(Johanas Gutenberg)의 금속활자보다 80년을 앞섰다는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나 세종 때 만들어진 다양한 발명품들이 그렇듯이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과학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내려 했던 조선의 과학자들. 벅찬 마음으로 탐구열을 불태웠을 모습을 떠올리니 새삼 이들이 만났던 우주가 궁금해진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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