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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이야기 길 - 오늘의 한반도를 위한 교훈 -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이산저산구름 2015. 7. 28. 08:41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크게 패배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왕은 무릎을 꿇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이 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참혹한 결과에 비해 조선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당해야 했는지 그 원인과 책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픈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를 따라 길을 나선다.

 


- 서울에서 강화까지, 그 비탄의 길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선착장은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가, 병자호란(1936~1937년) 때 봉림대군이 다급한 걸음으로 인조를 모시고 몸을 피했던 쓸쓸한 길이다.
정묘호란 당시, 도성을 떠나 강화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머물렀던 인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이곳에 행궁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정묘호란에서 배워야 했던 건 피난처 건설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대비책이었다. 연미정에서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언제든지 침략할 수 있다는 청나라의 경고를 안일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 인조, 남한산성에서의 47일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36년 겨울, 청나라의 10만 군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조선 땅을 침범한다. 인조는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히자 임시로 몸을 피한 것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며 거쳤을 남문 앞에 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350년이 넘은 나무의 의젓한 풍모가 오랜 세월을 이겨낸 성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남문에서부터 성곽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내밀어 성 밖을 내려다보았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었으니 이곳에서 인조는 까맣게 몰려드는 청나라 군사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더 이상 도망 갈 곳 없이 마지막 은신처를 위협받던 순간,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곽을 따라 계속 걸어나가면 수어장대가 나타난다. 인조가 이곳에서 직접 군사들을 지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이 공격을 하는 대신 성 안의 물자와 식량이 다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성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올 지원병을 기다렸지만 조선 어느 곳에도 그럴 만한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어장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서문이 있다. 지금은 야경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비지만 이곳은 인조가 청군에게 굴복하기 위해 나섰던 문이다. 47일 만의 항복과 그에 따른 엄청난 대가들을 생각하면 인조가 이 문을 걸어 나갔던 순간이 한층 무겁게 다가온다.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남문에 비해 초라한 서문의 모습이 굴욕적인 그날의 항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문에서 연주봉 옹성을 거쳐 30분 정도 걸어나가면 북문을 만나게 되는데, 그 근처에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을 피해 온 인조가 머물렀던 곳이다. 십장생도 병풍과 보료와 장침, 주칠조각경상, 발 등이 재현돼 있어 조선시대 왕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으므로 한번쯤 들러봄직하다.


 

- 난공불락의 성도 지킬 수 없었던 것

 

 

해발 500미터의 험준한 산세를 따라 지어진 남한산성은 누구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었지만, 위기 관리 능력을 상실한 조선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일화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쉽게 짐작된다. 전쟁이 터지자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 데 공을 세웠던 김류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로 보낸다. 하지만 김경징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연일 술판을 벌이며 청군이 강화까지 침입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결국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청군을 맞이해 강화를 내준다. 세자와 왕족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가 함락되자 조선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광주 목사였던 한명욱은 산성까지 곡식과 물자를 운반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며, 평지에 있는 창우리로 갑사창을 옮겨 군량과 물자를 저장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창우리까지는 무려 40리나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 산성에는 1만여 명의 군사가 한 달가량을 버틸 분량의 식량밖에 없었다. 당시 성내에는 1만 5,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있었으므로 최대한 절약해도 두 달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 안에 식량을 비축해야 비상시에 쓸 수 있을 터인데 한명욱은 왜 그런 결정을 한 걸까? 남한산성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받아 창우리 갑사창 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갑사창이 사라진지 오래라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남한산성 북문에서 하남시로 연결되는 길 어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로 위였다. 학예연구사는 한명욱이 갑사창을 옮긴 이유가 산 위까지 물자를 올려야 하는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인들과 야합했다는 설도 있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진실은 역사의 뒤편에 잠시 묻어두더라도 우리는 지배층이나 관리들의 잘못된 판단이 역사적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갑사창 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길을 돌아 나오며 생각해본다.

 


- 잊을 수 없는 기억,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

 

인조는 항복을 하기 위해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서, 잠실 부근의 삼전 나루터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굴욕적인 패배의 흔적이 담겨 있는 비석 앞에 서니 병자호란을 둘러싼 안타까운 사건들이 가슴을 친다. 이미 몇 차례 전쟁을 겪었음에도 제대로 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남한산성이라는 훌륭한 요새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조선의 무기력함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교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위기 상황과 그에 제대로 대처하고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이, 이 길이 던져주는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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