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한 지 19년이 되던 1795년,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으로 향한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그날의 능행은 정조가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자리였다. 그 8일간의 여정을 따라 걸으며 정조가 그렸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본다.
- 정조, 화성 능행을 떠나다
1794년, 정조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새로운 조선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이뤄내기 위한 새로운 공간, 즉 화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었다.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발전 가능성이 큰 수원에서 정조는 파벌 싸움으로 멍든 낡은 조선을 버리고 합리적인 제도를 도입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려고 했다.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열린 화성 능행은 바로 이런 정조의 뜻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 한강을 건너 화성으로 가는 길
한강철교를 마주보는 노량진 한구석, 정조가 수원으로 향할때마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머물렀던 용양봉저정이 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지만 정조가 화성 능행을 떠날 때면 빼놓지 않고 들르던 곳이다.
한강에 다리가 없던 당시 왕이 수원으로 가려면 배다리를 놓아야 했는데, 배다리란 배를 여러 척 띄우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배다리를 한 번 놓을 때마다 여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정조는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원은 정조에게 여러모로 의미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자신의 개혁 의지를 알리려 했던 곳이자, 아버지의 묘를 모신 곳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그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겪는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세력들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며 방해 공작을 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며 아버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재위 기간(1776~1800) 동안 열세 번이나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찾아갔는데, 한양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다른 왕들과 비교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 개혁 정치의 화려한 막이 오르다
화성 능행 두 번째 날, 한강을 건넌 정조는 지금의 남태령 옛길과 과천행궁, 인덕원사거리, 그리고 장안문을 통과해 마침내 화성에 당도한다. 장안문의 견고한 성벽을 끼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긴 산책 코스가 끝날 무렵,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서장대를 만난다. 2층으로 된 서장대에 오르면 화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을 지휘하기에 안성맞춤인 이곳에서 정조는 그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선보이며 왕권의 건재함을 확인시켰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히 군사적인 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개혁의 무대로 삼으려 했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에게 화성의 축성과 설계를 맡겼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조의 열망은 대단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한 합리적인 사회를 꿈꿨고 수원 화성은 그 시작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이 가능한 도시로 육성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려 했다. 국영 농장을 설치하고,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저수지를 축조하는 등 선진적인 농법과 경영 방식을 도입한다. 더 이상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백성들이 수탈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관상(官商)이라는 시전 상인들이 가진 독점 상업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공인들도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상업의 자율성을 확대해 갔다.
- 백성과 함께하며 나눈 개혁의 기쁨
서장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정조가 수원에 올 때마다 머물렀던 화성행궁이 있다. 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은 봉수당으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곳이다. 현재 봉수당에는 회갑연 당시 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리던 정조의 모습과 회갑연 상차림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사실 그날은 혜경궁 홍씨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도세자의 회갑 날이기도 했다. 정조는 개혁의 서막을 울리는 이곳에서 비통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의 회갑 잔치를 함께 열고 싶었던 것이다.
화성에서 일정을 마무리하며 정조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노인들을 위한 연회를 연다. 그리고 화려한 불꽃놀이로 마지막을 장식한 덕분에 주변에 있던 백성들도 난생 처음 진귀한 구경을 즐겼다. 화성에 머무는 내내 정조는 백성과 더불어 행복하고자 했다. 백성을 위한 개혁을 꿈꾸던 군주였기에 그 과정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게 아닐까.
화홍문 근처, 버드나무가 빙 둘러싼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방화수류정에서 백성과 개혁의 기쁨을 나누었을 정조를 떠올려본다.
- 못다 이룬 꿈일지라도
마지막 목적지는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융릉이다. 능의 초입은 키 큰 소나무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숲을 통과하면 융릉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가까이서 볼 수 없었다. 멀찌감치 서서 사도세자의 묘 앞에 선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슬픈 뒷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뒤로 곧 개혁 군주인 정조의 의연한 모습이 따라온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품고도 복수가 아닌 화합을 꿈꾸던 정조. 그의 모습에서 참된 지도자의 면모를 엿보게 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수원을 떠나던 정조의 마음은 오랫동안 준비한 일을 이룬 뭉클함과 성취감으로 가득 차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는 이제 더욱 힘차게 고삐를 당겨 새로운 세계로 다가가리라 다짐하며 한양으로 향했을 것이다. 비록 얼마 되지않아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개혁은 중단되지만, 더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온 힘을 다 기울였던 정조의 뜻만큼은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감동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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