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봄과 여름, 두 차례에 걸쳐 성 안팎을 구경하는 순성놀이를 즐겼다.
짝을 지어 성을 한 바퀴 돌면서 꽃과 버들을 구경하고 소원도 빌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도성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고 순성놀이의 맥도 끊기고 만다. 긴 시간이 흘러 한양도성이 일부나마 복원된 지금,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기억을 찾는 새로운 순성놀이가 시작되고 있다.
- 한양도성의 탄생
순성놀이를 시작하기 전, 서울의 시작과 변화를 볼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는다. 3층에 위치한 상설 전시관은 조선건국을 시작으로 서울의 긴 역사를 펼쳐놓는다.
태조는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을 옮기고 싶어했고, 백성을 모아 98일 만에 한양도성을 쌓았다. 그 뒤 세종 때과 숙종 때의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빙 돌고 나면 만들어진 시대에 따라 성벽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대립, 그 결과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가장 가까운 인왕산 구간에서 첫 걸음을 내딛는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곳에서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사연이 담긴 선바위를 만날 수 있다. 조선 건국 당시 둘은 선바위를 성 안에 놓느냐 성 밖에 놓느냐를 두고 대립했는데, 선바위를 성 안으로 놓으면 불교가 왕성해지고 밖으로 놓으면 승려가 맥을 못 쓰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자 태조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태조가 안쪽으로 성을 쌓은 자리만 눈이 녹는 꿈을 꾸고, 이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선바위를 밖으로 내놓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영험한 기운이 있다 하여 소원 성취를 비는 치성터로 변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바위 근처에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선바위 근처에는 여러 무신상을 모신 국사당이 있는데, 함께 길을 걸었던 문화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지금도 무속신앙의 맥을 잇는 굿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 여전히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
이어지는 백악구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창의문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이 지역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한 1·21사태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던 곳이다. 오랫동안 군사 지역이었던 만큼 여전히 많은 군인과 경비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창의문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악마루에 도착한다. 백악마루를 지나면 총탄을 맞은 자국이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1·21사태 때 있었던 치열한 총격전의 흔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기관총이 난사되고 수류탄이 터진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 도시 개발 뒤에 숨겨진 서민들의 삶
백악구간이 끝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그대로 걸어 혜화문을 통과한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성곽을 끼고 한참을 걷는 이길은 한양도성의 네 가지 코스 중 가장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낙산구간이다. 가톨릭대학교 뒷길로 이어지는 이 길에서는 시대에 따른 성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가 제각각인 둥근 돌은 태조 때, 직사각형에 가까운 메주 모양 돌은 세종 때, 그리고 가로세로가 모두 두 자[尺]인 정사각형 성벽은 숙종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문화해설사의 말에 모두 성벽을 비교하느라 여념이 없다. 틈틈이 노역에 참가한 백성들의 출신지가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도 눈에 들어온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작고 다정한 집들을 볼 수 있는 장수마을, 한국의 몽마르트 언덕이라 불리는 낙산공원, 그리고 좁은 골목 곳곳의 벽화가 유명한 이화마을을 차례로 만난다. 이화마을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 험한 돌산 절벽에 세워진 독특한 풍경의 창신동 절벽마을에 다다른다. 절벽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을 보고 있노라니 점점 화려해지는 도시와 끊임없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서민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 사라진 한양도성을 찾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남산 구간에는 국가의 위급함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던 봉수대와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엿볼 수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일제가 식민 지배를 상징화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1918년에 지은 조선 신궁의 흔적이 남산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선 신궁의 땅 밑에서는 한양도성의 성곽 일부가 100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가 조선 신궁을 짓기 위해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었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성곽을 훼손한 흔적은 한양도성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작은 숭례문이었다. 일본 왕세자의 방문을 빌미로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고, 친일 세력들은 숭례문 바깥으로 귀인을 맞이한다는 뜻의 봉영문(奉迎門)을 세웠다. 뒤이어 서소문 주변 성곽과 서대문이 사라졌고, 조선 신궁을 짓고 동대문에 운동장을 만들면서 또 한 차례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렇듯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는 공간 위에 지금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백범광장이 들어서 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과 동상을 통해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셈이다. 남산의 성곽길을 따라 걷다 탁 트인 백범광장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면 한층 마음이 벅차오른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재판 모습을 살펴보며 선조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광복 이후에도 도성은 한동안 방치된 채로 남겨졌다. 남산에는 정보기관과 미군이, 북악과 인왕산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를 잡으면서 순성놀이는 한참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양도성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대로 지켜내려했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순성놀이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 다시, 순성놀이를 시작하다
전 세계적으로 서울과 같은 도읍에는 성곽이 있어 외세로부터 도시를 지키고 다른 지역과 구분 짓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특히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한양도성은 세계 최대 규모이자 최장 기간 도성의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아직까지는 한양도성에 대해 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지않은 듯하다. 하지만 서울을 감싸안은 고즈넉한 성벽 위에서 만나는 자연과 여러 사연을 떠올리면 이곳이 다시 서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한양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도성을 돌았듯이 한양도성이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에게도 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본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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