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섯 번째 이야기 길 - 7년 만의 승리 - 의병과 승병

이산저산구름 2015. 7. 7. 09:13


 

- 함께

 

 

임진왜란이 터지자마자 조선은 순식간에 한양을 빼앗긴다.하지만 7년간의 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조선이었다. 물론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같은 영웅들의 활약도 있었지만, 그 승리의 바탕에는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의병과 승병들의 희생이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거둔 산성을 둘러보며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애국심을 되새겨보자.

 


- 임진왜란의 서막

 

 

1592년 4월 13일 아침, 일본이 15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일본군은‘명나라를 치러 가는길이니 길을 빌려달라’고 통보했고, 이를 거부하자 다음날 아침부터 부산성을 공격한다. 겨우 1,000여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던 부산성은 손쉽게 점령당했고,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진격했다. 선조는 도망치듯 도성을 빠져나가 의주까지 도망치고 일본군은 전쟁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평양까지 점령한다. 이렇듯 임진왜란은 조선의 터무니없는 패배로 시작됐다. 무기도 병력도 크게 차이 나는 상황. 그러나 조선은 7년여를 버텨 1598년 결국 일본을 물리친다.

 


-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과 승려들

 

지금은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성벽이지만, 그 옆을 거닐며 치열했던 싸움을 떠올려본다. 독산성은 권율 장군이 도성을 되찾기 위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권율은 이곳에서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 장수 우키타가 이끄는 부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 당당히 승전보를 울린 권율의 부대는 도성을 향해 조금 더 전진한다. 다음 거점은 바로 모두가 잘 아는 행주산성이었다.
권율이 행주산성에 도착했을 때, 승병장인 처영도 승려들로 구성된 의병 부대를 이끌고 이곳을 찾는다. 관군과 승병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총 병력은 몇천 명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군이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군은 열 배가 넘는 적들과 싸움을 시작한 셈이었다.
대첩문을 들어서며 나라의 위기를 걱정했을 권율과 처영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문을 통과하면 곧 권율 장군의 동상이 보이고 그리 높지 않은 야산 옆으로 길이 이어진다.
행주대첩(1593년)은 몇 번의 위기를 겪는다. 권율 장군의 독려아래 일본 장수의 공격을 꺾기도 했지만 이내 더욱 거세진 일본군의 공격을 맞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처영이 지휘하는 승군이 나서 싸움을 이끈다. 정규 군인은 아니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살생도 불사한 승려들을 쉽사리 막을 수는 없었다.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일본군 장수는 남은 병력을 모아 승병을 무너뜨리고 성 가까이까지 진격하지만, 조선군과 백성들은 권율의 지휘 아래 합심해 행주산성을 지켜낸다. 무기가 떨어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을 던지는 등 모두가 마지막 힘을 모아 마침내 일본군을 이긴 것이다. 승려와 백성 모두의 호국정신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 전시에 빛난 선비 정신

 

 

평소엔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향교와 서원들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행주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우저서원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조헌의 덕행을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 사신이 명나라를 치러 갈 길을 내어달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했다.
그는 일본의 이런 뻔뻔한 요구가 머지않아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예견한 대로 이듬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고 관군은 계속해서 패배한다. 분개한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청주성에서는 영규대사만이 승려들과 외로이 적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헌은 영규대사와 함께 적들이 주둔하던 성을 탈환하고 다음 싸움을 준비하지만 수만 명의 정예군과 전투를 벌이는것은 쉽지 않았다.
금산전투를 시작하며 그는 “오늘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도망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맨손으로 북을 치며 싸운 이 전투에서 영규대사와 700여 명의 의병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하지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의를 걸고 싸웠던 선비들의 결기가 통했던 것일까. 전투를 마친 적들 역시 큰 피해를 입어 빼앗았던 성을버리고 도망친다. 결국 의병과 승병들이 죽음으로 금산을 지켜낸 것이다.

 


- 평양성 탈환의 일등공신, 불랑기자포

 

임진왜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육군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흔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무기가 조선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일본군은 조총을, 조선군은 활이나 칼, 창 같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개인 무기에 있어서는 일본군이 앞섰다는 말이 맞지만, 조선군에게는 화포나 석포 같은 특수 무기가 있었다. 대형무기만 보자면 조선이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육군박물관에서는 당시에 사용됐던 여러 무기를 볼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무기가 바로 불랑기자포다. 불랑기자포는 선조가 의주까지 도망가 있던 상황에서 평양성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도망친 왕과 나라를 지킨 백성

 

 

다음으로 찾은 곳은 파사성. 이곳 역시 승병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인 의엄은 왜군과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의 성벽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황해도 구월산 일대에서 500명에 가까운 승려들을 모아 활동하던 그는 3년 여에 걸쳐 파사성을 증축한다.
나지막한 야산을 따라 파사성에 오르면 여주와 양평으로 이어지는 남한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덕분에 지금은 유유히흐르는 물과 숲 등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일본에 내주었던 조선이 다시 땅을 되찾는 데는 훌륭한 장수와 화포 같은 신식 무기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큰 힘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에 있었다. 이들은 국가가 정식으로 임명한 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싸움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어떤 대가를 바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어느 정식 군대 못지않았다.
임금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떠났지만 글을 읽던 선비들과 살생을 금기시하는 승려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만큼 조선 백성들의 호국 정신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싸워 일본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온전히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 뜨거운 열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조차 알 수 없지만 애국 정신 하나로 전장에 나섰던 이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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