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다와 숲으로 유명한 강화. 다채로운 자연을 볼 수 있는 섬 곳곳에는 여전히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상처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강제로 조선을 개항하려했던 서구 열강의 흔적보다 더 아픈 역사는 눈에 보이지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약탈당했지만 아직도 되찾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재 이야기다.
- 삼랑성에서 울린 승전보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 앞바다에 출현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한 해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던 프랑스에게 강제 개항의 빌미를 주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갑곶돈은 이제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곳이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처음 강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곳을 점령하지만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의 반격은 매서웠다.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에 진을 친 조선은 양헌수(1816~1888) 장군이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여명으로 프랑스군을 크게 이긴다.
조선의 승전보가 울린 삼랑성의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걷는다.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성벽이 가파른 산길을 끼고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낯설기만 한 푸른 눈의 군대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성벽들이 지금도 단단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삼랑성에서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강화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군을 무사히 쫓아낸 것은 다행이었으나, 어쩌면 이때 조선은 스스로 힘을 과신하면서 외세에 대해 대비할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을 풀고 단계적으로 세계와 교류를 시작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 초지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지진은 둘레가 500미터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입구 부근에서는 성벽에 남아있는 포탄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은 오랜 시간을 건너 싸움의 현장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전투는 초지진에서 멀지 않은 광성보, 덕진진으로 계속해서 번져간다.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은 광성보인데,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육박전이 벌어졌다. 당시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은 열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 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
광성보 안에 있는 신미순의총은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미 해병대의 기록에는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정신전에서는 졌다”라는 대목이 남아 있다. 적군마저 숙연하게 한 그들의 결의 앞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도난당한 국가의 보물
광성보에서 내려다보는 강화의 바다는 이제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을 침략한 이들이 보물들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군이 자국으로 돌아가기 전 책과 문서를 마구잡이로 약탈해 간 외규장각은 비운의 장소다. 지금은 크게 볼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왕립 도서관으로 1,000여 종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가져간 책 중에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가 있었다. 이는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지만, 우리는 민족의 보물이 프랑스에 도난당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기록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모두 불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문화재 반환, 그 험난한 길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 이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반출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고려나전경함’, ‘경천사 십층석탑’ 등도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문화재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에 있다고 하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외규장각 의궤’ 역시 힘겹게 한국에 돌아온 문화재 중 하나다. 오랫동안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의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1975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지하의 먼지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감
동적인 조우였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문화재인데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박병선 박사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하자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이 땅을 떠난 지 145년 만에 마침내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귀환은 아니었다. 양국이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찍을 수도 없고, 지방 전시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프랑스 측에서 기간 연장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소식에 박병선 박사는
“내가 책이라면 울면서 한국으로 갈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불법적인 약탈뿐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에 눈 먼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을 떠나는 문화재도 많다는 점이다.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이다. 당장 모든 문화재를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에 있건 우리 문화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내야 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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