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두 번째 이야기 - 사라진 고대 왕국을 찾아서 - 백제의 첫 번째 도읍지 한성

이산저산구름 2015. 6. 16. 09:51

 

 

흔히 백제라고 하면 충남 공주나 부여부터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백제가 전성기를 누리며 가장 오래 도읍으로 삼았던 곳은 위례성, 즉 한성이었다. 잊혀진 백제의 옛 도읍을 찾아 그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려본다.

 


- 온조의 위례성을 찾아서

 

백제가 서울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백제 하면 충남 공주나 부여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 터를 잡은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500년 가까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가 흔히 백제의 중흥기로 알고 있는 근초고왕이 집권했던 때도 바로 이 한성 백제 시절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기 훨씬 전에 이 땅에 왕도를 일구었던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는 어째서 망각의 어둠에 묻히게 된 걸까?
『삼국사기』에 보면 북방에서 내려온 온조와 비류 형제가 지금의 북한산인 부아악에 올라 도읍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형인 비류는 인천 지역인 미추홀에, 동생인 온조는 서울 지역인 위례성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는데(기원전 18년), 비류가 죽고 난 뒤 그 세력이 위례성에 합쳐져 백제를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한강 부근에 자리한 백제 위례성,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도읍지다.

 


- 한성백제의 중심지,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특히 주목할 것은 한성 백제의 중심지였던 두 토성이다. 먼저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동 토성으로 향한다. 얼핏 보기에는 거대한 제방처럼 보이는 풍납동 토성은 아파트와 빌딩에 가려 그 규모를 쉽게 알아채기 힘들다. 학계에서는 그 규모를 이웃한 몽촌토성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로, 오늘날 풍납동 토성을 쌓는다면 8톤 트럭 20만 대 분량의 흙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곳에 대규모 노동력을동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발굴된 유물의 양 역시 어마어마한데 유물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 역시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살았던 큰도시가 있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이 풍납동 토성이 위례성이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풍납동 토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올림픽공원에 있는 능선을 따라 길을 걸으면 성벽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세웠던 목책(木柵)이 보인다. 발굴 초기에는 이곳을 위례성이라 여겼지만, 풍납동 토성이 발견된 이후 그 주장은 힘을 잃었다. 이곳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규모와 축조 방법, 출토 유물들을 보면 한성 백제의 중요한 성곽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서로 이웃한 두 토성을 거닐면서 소문도 없이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린 과거를 다시 불러내본다. 오래전 이곳을 가득 메웠을 백제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것 같다.


 

- 근초고왕을 만나다

 

 

주변이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거대한 무덤이 하나 있다. 바로 백제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는 근초고왕(?~375)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3호 고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백제의 역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다.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대외 관계의 폭을 넓히고, 해상 무역을 발전시키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백제 초기의 불완전했던 왕권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는 백제의 힘을 한반도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중국 산둥반도와 요서 지방까지 진출하였고, 일본에 백제의 선진 문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백제의 영토를 지금의 전라도 지역까지 넓혀 마한 세력을 병합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 다시 한성백제를 기억하며

 

 

이렇듯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치던 백제의 국운도 서서히 다하기 시작한다. 풍납동 토성의 강 건너편에 위치한 아차산성. 지금은 평화로운 공원이 된 이곳은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과거 근초고왕에게 평양성을 침공당하고 왕까지 잃었던 고구려가 힘을 모아 백제를 공격한것이다.
백제는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에 맞서 7일 밤낮을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위례성을 장수왕의 손에 넘기고 만다. 이렇듯 한성 백제는 개로왕의 죽음과 약 8,000명의 포로만 남긴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후에 한성 백제의 수도가 처음 소개된 『삼국사기』에서도 위례성의 위치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는다. 백제가 이루었던 놀라운 문화를 떠올리면 너무나도 쓸쓸한 결말이다.
그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유물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안타깝다. 풍납동 토성에서 발견된 수로나 토관은 1,600년 전 한성백제에 하수관이 있었으며, 백제인들이 그만큼 발전된 토목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과학과 문화가 어우러진 막강한 고대국가였던 한성 백제의 유적들은 지금도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개발의 논리에 휘말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성 백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낳은 결과다. 이제라도 한강 주변에 백제인들이 세운 멋진 고대국가의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바로알고, 그 유산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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