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5,000년이라 말하지만,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던 건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억 년 전, 한반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구석기시대부터신석기·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한반도 고대 문명의 뿌리를 찾아본다.
- 세계의 고고학 역사를 뒤바꾼 아슐리안 주먹도끼
1978년 4월 어느 오후, 서울대 고고학과 고(故) 김원룡 교수 연구실로 석기 하나가 배달되었다. 발신인은 그렉 보웬(Greg Bowen)이라는 미 공군 병사였다.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그렉 보웬은 한탄강 유원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석기가 의미있는 유물임을 알았다. 석기를 받아 본 김원룡 교수는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한달음에 현장을 찾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당시까지 주요하게 받아들여지던 모비우스 학설을 뒤집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전까지 고고학계에서는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의 구석기문화가 상당히 뒤떨어지고 정체되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전곡리 유적 발굴은 다분히 서구 중심적이었던 이 관점을 단번에 뒤엎는 대사건이 된 것이다.
이 세계적인 사건의 주인공인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연천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공원에 조성해놓은 선사시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30만 년 전 한반도 어느 숲 속에서 살기 시작했던 원시인류 호모 에렉투스는 털이 없고 반들반들한 피부에 광대뼈가 높이 솟은 얼굴, 튼튼한 턱과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 사나운 맹수와 추위 속에 던져진 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은 자연에서 얻은 불씨로 추위를 물리쳤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수렵과 채취로 생활했던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사냥한 짐승의 뼈와 가죽을 벗길 때나 땅속 깊이 박힌 뿌리를 자를 때면 이 주
먹도끼를 이용했다. 그들이 바로 전곡리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었다.
- 슬기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
아슐리안 석기를 쓰던 구석기시대를 지나 신석기 문명을 만나러 간 곳은 암사동에 있는 선사 유적지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공동생활을 했던 신석기인들의 모습을 재현한 움집들이 있는데, 정착 생활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를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농사를 지었고, 빗살무늬토기를 이용해 음식도 조리해 먹었다. 이들은 불을 피우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빗살무늬토기였다. 생생한 질감이 느껴지는 토기를 보며 오래전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보았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모습과 가깝게 느껴졌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오래전 일이지만, 점점 문화를 갖추어 가는 인류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 고인돌과 권력의 탄생
한반도에 남은 인류의 흔적을 따라 다음으로 찾은 곳은 청동기시대의 가장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이 있는 강화다. 사진으로 자주 접한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거대하고 웅장했다. 운송 수단도 없이 이 거대한 돌을 떼어내고 운반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박한 형태로 함께 모여 살던 신석기인들과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벌써 권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 200~300명을 통솔해 돌무덤을 만들었다. 커다란 고인돌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고인돌이 수십 기에 달하는 것을 보면 청동기시대 이곳에 살던 인류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이 땅에 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괜히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 아득한 과거를 돌아 현재로
그렇다면 인간이 살기 전,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화성시 고정리로 걸음을 옮긴다. 공룡알 산지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나무다리로 잘 정비되어있지만, 그 주변으로 억새풀이 거칠게 자라나 있어 원시시대 한반도를 그려보게 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생대 퇴적층들이 보이고, 그 안에 작은 돌멩이처럼 보이는 공룡알 화석이 담겨있다. 1억 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 눈앞에 있는 공룡알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이 땅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면 보통 고려나 조선과 같은 역사시대 이후를 생각한다. 그리고 선조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 속에서 현재와 닿아 있는 정신을 찾아보곤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전, 한반도에는 생명이 살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으로 강가를 누비던 공룡의 시대를 지나 주먹도끼를 쥔 구석기인, 빗살무늬토기에 음식을 담아 먹던 신석기인, 고인돌을 만들었던 청동기인까지……. 모두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 속에 가만히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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