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길 2 - 금강 천 리, 대청호 둘레 오백 리(2)

이산저산구름 2014. 10. 2. 11:54

  

 

 

<11구간>

 

- 옥천 청마리 제신탑
마을 사람들의 성지

 

안터마을, 피실, 청마리로 향하는 세 갈림길에서 충북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로 조금 들어가면, 옥천 청마리 제신탑(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이 보인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쌓았다. 꼭대기에는 기다란 돌 하나가 솟아 있다. 솟대와 장승도 제신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마을 모습을 만든다.
원탑(조산탑), 솟대, 장승, 산신당 등이 복합된 제신탑은 제신당 혹은 탑신제당이라고 불리는 신당유적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를 신이 깃든 나무로 여겨 산신당을 만들어 모신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탑, 솟대, 장승 순으로 제사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 나고 계속 살아온 김동훈 씨는 제신탑 주위 잡초를 뽑으며 주위를 가꾸고 있다. 제신탑 앞집에 살고 있어, 틈나는 대로 제신탑을 둘러본다.
“옛날에 교회나 절이 없었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여기가 성지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기도도 하고.”
제신탑 뒤로 청마분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분교 앞 넓은 운동장에 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학교는 헐렸지만, 학교에서 자리를 지키던 동상 두 개가 아직 남아 있다.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소년 정재수의 동상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둘을 교육의 본보기로 여겼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며 많은 것이 변했지만, 제신탑만은 제자리를 지켰다. 청마리 옆을 흐르는 금강 물줄기도 멈추지 않았다. 청마리 바로 앞에 흐르는 너른 금강이 시원하다. 청마리 사람들은 너른 금강 줄기를 젖줄로 삼고, 제신탑을 위안처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12구간>

 

- 옥천 경율당
정자가 된 서당

 

옥천 청마리 제신탑은 금강 왼편 마을에 있다. 이곳에서 산길로 말티를 넘어 청동마을을 지나고 가덕교를 건너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옥천군 안남면에 다다른다.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에는 경율당이 있다.
조선 영조 12년(1736)에 용궁 전씨의 시조 전습의 47대손인 전후회가 세운 옥천 경율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전후회는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해,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짓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고 했다. 경율당은 앞면이 네 칸, 옆면이 두 칸, 팔작지붕이고 네 면 모두 마루가 있는 전형적인 서당의 구조다. 지붕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이 있어 1730년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율당 가까이에 논과 밭, 마을이 있다. 경율당 바로 옆에서 깻잎을 따고 있던 양애자 씨는 이곳과 인연이 깊다. 용궁 전씨 집에 시집 와 경율당에서 문중 제사를 지냈던 일이 마치 어제 같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경율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이곳을 들여다본다. 마당에 잔디는 깎았는지, 별일은 없는지…. 마을 사람들은 경율당을 친근하게 생각한다. 마을 곁에 항상 있었던 곳. 비록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정자라고 부른다.

 


<13구간>

 

- 옥천 독락정
마을에 남은 정자 하나

 

 

옥천 독락정(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이 있는 곳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다. 안남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다. 독락정은 면소재지에서 금강쪽으로 붙어, 둔주봉 자락을 뒤로하고 금강을 앞에 둔 곳에 있다. 금강이 둔주봉을 감싸며 휘돌아 나간다. 겨울에 얼음이 두껍게 얼고 봄이 되어 날이 풀릴 때 쯤이면 언 강이 녹으며 ‘꽝꽝’거리는 강울음 소리를 낸다.
해 질 무렵 연주리는 평화롭기만 하다. 낯선 이의 방문에 짖던 개들도 이내 조용해진다. 이곳은 원래 초계 주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많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주 씨가 많다.
영모사와 영모각을 지나 독락정으로 향한다. 독락정은 조선 선조 40년(1607)에 절충 장군 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주몽득이 세운 정자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고 세상을 논하던 정자 역할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 유생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 이용했다. 영조 48년(1772)에 고쳐 지은 이후 여러 번 고쳤다.
앞면 두 칸, 옆면 두 칸 아담하고 소탈한 건물 앞과 옆으로 돌담을 쌓았다. 독락정 바로 앞에 대청호가 있지만, 사이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와 대청호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았다. 독락정 바로 옆의 영모각은 초계 주씨의 옛 사당이며, 영모사는 새로 지은 사당이다.
초계 주씨의 세사(世祀)는 연주리 사람들의 잔칫날이기도 했다.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술도 한잔씩 곁들이는 초계 주씨의 세사에는 주 씨가 아닌 마을 사람들도 찾는다.

 


- 둔주봉 정자
한반도 품은 계곡마다 햇살 가득

 

 

둔주봉 정자는 한반도 전망대로 유명하다. 둔주봉 정자에서 밑을 굽어보면 한반도를 좌우로 반전해 놓은 듯한 형상이 보여 많은 이가 찾는다. 사진 동호인들이 그 모습을 담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 2007년에 둔주봉에 정자를 세웠다.
둔주봉 정자에서 좌우를 반전해 놓은 듯한 한반도 지형이 잘 내려다보인다. 둔주봉 정자에 앉아 굽은 금강을 바라본다. 햇살 좋은 날, 둔주봉에 오르면 산줄기 계곡마다 아름답게 스민 햇살을 볼 수 있다.

 


<14~15구간>

 

- 안내천 인공습지와 구국정신 어린 가산사

 

금강줄기가 만들어낸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둔주봉에서 그대로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옥천군 안내면 면소재지에 닿는다. 이곳에는 안내천 인공습지와 옥천 안내토기 공장이 있다. 인공습지는 조용하게 산책하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안내토기 공장은 전통방식으로 토기를 제작해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이곳에서 채운산 기슭에 자리잡은 가산사에 걸어가려면 굽이굽이 산길을 타고 장고개를 넘어 안내면 답양리까지 가야 한다.

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 지리지에 가산암이 오래 전에 없어진 작은 암자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기허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 선생이 승군과 의병을 일으켜 훈련한 호국도장으로 잘 알려졌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이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후, 가산사에서 이를 기려 영정각(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을 짓고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다. 영정각은 조선 숙종 20년(1964)에 지은 것으로 추측하며, 산신각(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은 산신불화를 봉안하기 위한 집으로, 영정각과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본다.
작은 크기의 영정각, 산신각과 한 마당을 둔 극락전 역시 규모가 크지 않다. 아담한 크기의 사찰이지만 품은 기운은 여느 사찰을 능가한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의 정신이 서려 있어 그런지 나무 한 그루, 들꽃 한 송이도 범상치 않다.

 


- 분저리 농촌체험마을
여전히 농사짓는 평화로운 마을

 

은운리에서 구름재를 넘어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 분저리 농촌체험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구름재를 굽이굽이 도는 비포장도로를 오르며 보이는 대청호와 산줄기가 장관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구름재를 넘으면 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분저리 농촌체험마을로 들어간다는 신호다.
분저실 마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1980년에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됐고, 2003년에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조성됐다. 농촌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외부 사람들이 자주 찾지만, 이곳에서 오래 산 마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지을 뿐이다.
속리산 자락과 대청호가 만난 풍경을 배경으로 두른 분저실 마을은 깔끔하고 한적하다. 분저리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이해원 할아버지는 대청댐 담수로 인해 생활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학교, 면사무소 이런 디를 10분이면 갔었는디, 지금은 이설도로로 두 시간 걸어가야 햐. 수몰되면서 여기가 아주 섬이 돼서 불편해.”
불편해진 생활보다 서운한 것은 잃어버린 옛 풍경이다.
“금강이 고대로 있으면 점심 먹고도 목욕 갔을텐디. 백사장이 깔려 있고, 좋았지…. ”
옛 금강의 모습은 이해원 할아버지 마음속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수몰의 경험은 마을 사람들에게 상실감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마을은 평화롭다. 마을에는 점점 다른 지역에서 와 정착한 사람이 늘어 간다. 그리고 농촌체험을 하기 위해 마을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