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구간>
- 부소담악
바위는 병풍처럼 이어져
부소담악 위에 세운 추소정으로 향하기 전에, 목장승이 연이어 서있는 장승 공원에서 장승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재밌다.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 위에 떠 있는 산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700m 정도 되는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대청호 주위를 둘렀다. 데크로 만든 계단을 올라 부소담악 위에 새로 세운 정자 추소정으로 향한다. 추소리에는 70여 가구가 살고 있다가, 대청댐을 만들며 대부분 다른곳으로 이주했고 남은 사람들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민들이 정주권 사업으로 뜻을 모아 2008년에 추소정을 만들었다.
추소정에 올라 부소담악을 바라본다.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마치 조각 같다. 지금 모습과는 달랐겠지만,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이곳을 보고 마치 소금강 같다고 예찬했다.
원래 산이었던 이곳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병풍같은 바위가 수면에 비추어 제 키를 높인다. 부소담악의 한 부분, 물에 잠긴 그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수면에 반영된 부소담악의 모습으로 옛 모습을 짐작해 본다.
멀리,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고기가 아무리 안 잡혀도, 길게 늘어진 바위 병풍을 바라보면 심심할 리는 없을 것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금의 부소담악을 다시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부소담악이 예전과 비교해 아름다움이 덜하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만은 여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8구간>
- 추소리
부소담악에서 이어진 아름다운 마을
추소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커다란 둥구나무가 드나드는 이를 맞는다. 둥구나무 옆 게시판에 마을을 그린‘추소리 전경 및 환산과 약도’가 눈에 띈다. 추소리 박찬훈 이장이 그린 약도에는 부소담악에서 이어지는 추소리 전경이 나온다. 집집을 그려 넣고, 마을에 사는 사람 이름을 하나씩 넣는것도 잊지 않았다. 마을 지도를 떠올리며 찬찬히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에 앉아 부인과 배 포장이 한창인 유국현 씨는 “원래 아름다운 마을이라 외지에서도 많이들 와요.”라고 이야기한다.“지금은 40가구가 좀 넘게 살아요. 대청댐 생기고,‘추동’이라는 데가 수몰됐는데, 거기가 진짜배기였지.”
유 씨는 지나간 마을을 추억하며 안타까워했다. 댐은, 고향을 잃은 사람에게 주는 의미가 남달랐다. 삶을 시작한 곳이 물속에 잠긴 사람의 허망함은 짐작만 할 뿐이다. 많은 것을 삼킨 대청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유 씨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추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이지당을 만나기 전까지 추소리의 모습이 머리에 남았다.
- 옥천 이지당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
쓸쓸히 호수 위에 선 옥천 이지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은 조선 시대 서당 건물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의병장 조헌 선생이 인근 학생을 모아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각신서당이었는데 송시열이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의 끝 글자 ‘지(止)’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 이름을 고쳤다. 송시열도 이곳에서 영재를 모아 교육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지금 건물은 1901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여섯칸은 강당이고, 양 옆으로 누각이 있다. 정면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왼쪽은 독립된 지붕이고, 오른쪽은 강당과 이어져 있다. 독립된 지붕인 왼쪽 누각은 다른 지붕보다 높이 서 있다. 누마루 아래로 남은 공간엔 바닥을 더 깊게 파내어 부엌으로 썼다. 누마루와 같이 삼면이 열린 부엌이다. 부엌 앞으로 놓인 계단을 올라 누마루에 앉아 본다.
풍경, 바람, 새소리가 한꺼번에 집안으로 빨려 들어온다. 우리 조상들도 ‘쉼’을 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누마루에 앉으면 등을 기대어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9구간>
- 청풍정, 명월암
명월이 떨어진 바위에 김옥균의 글씨 새겨져
이지당 앞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며 다시 바라본 이지당은 꼬마 서방님 같다. 가까이 섰을 때는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것이 멀리서 바라보니 자연 앞에서 보잘것없이 작다.
아예 폭 자연에 숨어 감춘 모습도 많다.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은 자연에 꼭꼭 숨어버렸다. 50여 가구 남짓 살던 마을이 물에 잠기고 지금은 열 가구 남짓 남았다. 진걸마을을 지나면 김옥균과 기생 명월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청풍정과 명월암을 볼 수 있다. 청풍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명월과 은신했던 곳으로 전한다. 그때 김옥균의 나이 서른넷이다. 매일 불안에 떨던 김옥균을 보며 명월은 나약해진 김옥균이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청풍정 옆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김옥균에게 사랑과 용기를 북돋는 긴 편지를 남기고 명월은 그렇게 떠났다. 그 바위에 김옥균이 새겼다는 명월암(明月巖)이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 옥천 육영수 생가, 옥천 향교, 옥천 옥주사마소
구읍에 가면 만나는 실개천과 함께
충청북도 옥천군 구읍으로 들어가면 대청호가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 향수 백리길 등 이 길에 붙은 이름도 많다.
구읍은 1905년, 옥천역이 들어서기 전, 옥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역이 현재 읍내 자리에 지어지고, 옥천군의 주요 시설이 역 근처로 옮겨 가면서 옛날 읍내로 변했다.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은 동네, 그곳에서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옥천 육영수 생가(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가 있는 골목에 옥천 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와 옥천 옥주사마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가 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고, 사마소는 생원과 진사가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찬찬히 훑어보면 마을 전체가 볼거리다.
<10구간>
- 안터선사공원
마을을 지킨 수호신 할머니
여름밤이면 안터마을은 반딧불이 불빛으로 반짝인다. 그만큼 청정하다는 뜻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니 공기가 맑다. 안터마을의 초입, 이곳이 마을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고인돌과 선돌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안터선사공원으로 꾸몄다.
옥천 석탄리 고인돌(충청북도 기념물 제147호)은 주검을 땅 위에 두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4면에 널돌을 세우고, 그 위로 길고 평평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다. 지금은 앞뒷면 널돌은 사라졌고 양쪽 면에만 널돌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이곳에 묻힌 사람이 여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덮개돌에는 바위 구멍이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시간이 쌓여 응축된 덮개돌은 시간이 지나며 갈라지기도, 조금씩 모양이 바뀌기도 했을 것이다.
옥천 석탄리 선돌(충청북도 기념물 제148호)은 안터마을에서 ‘할머니’라고 불린다. 마을의 평안을 지켜 주는 할머니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세워 놓은 길쭉한 자연석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와 있어, 마치 임신한 여성의 모습 같다. 선돌이 있는 주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선돌이 조상신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 무늬가 성긴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고인돌과 선돌 모두 신석기 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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