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구간>
- 관동묘려, 송명의 선생 유허비
며느리 의지로 이룬 일부종사
반듯하게 자란 미루나무가 늘어선 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면 마산동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0호)으로 오르는 사슴골 입구에 다다른다. 이 길을 따라가면 관동묘려(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7호)와 만난다. 관동묘려는 고흥 류씨(1371~1452)의 제사를 지내려고 1452년 만든 재실이다. 류 씨는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다.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은 류 씨에게 양쪽 부모는 고려 시대 풍습대로 재혼하기를 다독였다. 류 씨는 홀로 송유를 등에 업고, 수백 리를 걸어 시댁을 찾아 일부종사를 고집했다. 이후 송유는 12세에 부사정이 되었으나 13세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송명의 때부터다. 송명의가 회덕 황씨와 결혼하면서부터 회덕과 은진 송씨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 말 조선 개국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 송명의가 아내의 고향인 회덕으로 내려와 정착했고, 쌍청당 송유 대에 이르러 회덕에 은진 송씨의 명성이 높아진다. 이곳에는 송유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있다. 관동묘려 옆으로 난 길로 조금 올라가면 1835년에 세운 송명의 선생 유허비가 며느리의 재실 위에 있다. 송명의 선생 유허비는 1835년, 선생의 14대손인 송기정이 세우고, 1876년,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세웠다. 대청댐 건설로 선생의 유허비를 세운 마을은 물에 잠기고, 유허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 미륵원지
회덕 황씨 넉넉한 인심이 어리다
송명의 선생 처가인 회덕 황씨의 흔적도 관동묘려와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관동묘려에서 걸어 20여 분 정도 거리인 미륵원지(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1호)는 고려 말 회덕 황씨 황윤보가 지어 조선 시대까지 후손들이 110여 년 간 운영했던 미륵원이 있던 곳이다. 미륵원지 대부분은 대청호에 가라앉고 일부가 남았다.
경상도 지방 성주에서 황간, 영동, 옥천, 증약을 거쳐 문의, 청주, 천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던 미륵원은 긴 시간 나그네를 돌보았다. 비영리로 길손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행려자를 위한 구호활동도 벌였다. 지금은 1980년에 이 터에 복원한 남루가 있다. 남루는 재실로 쓴다.
미륵원지 남루 옆 살림집에는 황윤보의 13대손인 황경식 할아버지 부부가 산다. 황경식 할아버지의 아내 육애수 할머니는 연신 “황 씨가 나쁜 사람이 없잖아. 참 착해.”라며 회덕 황씨의 품성을 칭찬했다. 할머니는 시아버지를 모시며 수몰 전부터 미륵원지에 살았다.
시아버지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문을 가르치던 선비 같은 양반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을이 호수로 덮이고, 지금 자리로 이사 왔다. 재실을 지킬 이가 없어 삼 년 정도만 지키려고 했던 것이 삼십 년이 넘었다.
“한번 자리를 잡으니까 떠나기가 쉬워? 지금도 매년 한 번은 육십 명 정도 모여서 시제를 지내
지. 옛날에는 제사도 자주 지내고, 한번 지냈다 하면 몇백 명씩 왔어. 떡을 열 말씩 말았으니까. 지금은 한 말도 안 해. 여기 앞에 보이는 산이 다 송 씨네 산이라고 하지? 옛날에는 황 씨네 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주 옛날이지만, 황 씨네가 송 씨네 외가잖아. 가끔 송 씨네에서 나이 지긋한 분들이 외가라고 인사하러들 오고 그래.”
회덕 황씨와 은진 송씨의 인연은 아직도 묘한 끈이 이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인심 좋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달기둥어리’에 있는 달걀을 꺼내 먹으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달기둥어리는 ‘닭 둥지’의 충청도 말이다. 마당에서 뛰어 노는 닭이 그곳에서 알을 낳는다고 한다. 할머니는 알을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하면, 가끔 병아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며 웃는다. 회덕 황씨 집안의 인심이 새삼 마음으로 다가온다.
<4구간>
- 신선봉유적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과 대청호 자연수변 공원 등이 있어 대청호 오백리길 중 대표적인 ‘낭만길’로 꼽힌다. 습지 위에 만들어 둔 데크를 따라 갈대와 들꽃을 만나고 가을에 국화축제를 여는 마을과 연꽃 마을 등이 구간 곳곳에 있다. 이중 S자 갈대밭은 드라마 ‘슬픈 연가’를 촬영했던 곳이다. 드라마 촬영지로 가기 위해서는 마산동 삼거리에서 추동에 가기 전 중간 즈음에서 대청호변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인, 가족이 함께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적절하게 인위적인 장치를 해 둔 길을 걷다가 금성마을에서 산으로 올라서면 신선봉유적(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2호)을 만날 수 있다.
들머리에서 그 산길 중간에 이런 장관이 펼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산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보이면, 그 장관이 펼쳐진다는 신호다. 바위 사이로 발을 옮기면, 또 다른 큰 바위들이 육중하게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자동차가 다니고, 농사를 짓는 생활 공간에서 고작 20분 정도도 걷지 않았는데, 마주하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 같다.
신선봉에 산성 형태의 석축이 둘러쌓여 있다. 동·서·북벽은 무너져 내리고 남벽만 남았다. 큰 바위에 글을 새겨 놓은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산성의 기능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신앙 등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큰 바위에 주술적 의미가 있는 바위구멍도 여럿이다.
가운데 있는 큰 바위는 절반이 갈라져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틈새가 있다. 그 위로 덮개돌처럼 보이는 너른 바위가 놓여 있다. 절반이 갈라진 바위 사이 좁은 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는 공간적 제약이 신선하고, 신성하다. 틈새 한쪽에 ‘佛(불)’ 자가 크게 주서(朱書)되어 있다. 그 맞은 편 쪽에는 ‘惺惺主人翁 皇皇上帝位(성성주인옹 황황상제위)’와 초서체로 ‘彌神藏(미신장)’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경건한 마음은 전해진다.
너른 바위 위에 올라 대청호를 바라본다. 신선이 와도 감탄할 만한 이 자리에 서니, 인간 세상이 참으로 쩨쩨하다.
<5구간>
- 김정선생묘소일원
‘밥 한 그릇’나누던 정신 대대로 이어져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유산은 김정선생묘소일원(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이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봄이면 벚꽃이 흩날린다. 김정선생묘소일원은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낸 충암 김정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이다.
대문이 닫혀 있어 초인종을 누르니, 이곳에 머물며 일하는 할머니 한 분이 대문을 열어준다.
할머니는 대문 안쪽으로 안내하며, 김정 선생 묘소 앞에서는 꼭 인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삼문에서 오른편 언덕길을 오르면, 담 너머 왼쪽에 김정 선생의 사당이, 오른쪽에는 이곳에서 사는 종부 최진하 할머니와 식구들이 먹을 농작물을 심은 텃밭이 있다. 김정 선생 부인, 은진송 씨정려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을 지나 묘 여러 기가 보인다. 김정 선생과 은진 송씨, 그리고 윗세대 조상들의 묘지다. 김정 선생 내외의 묘 앞에 비석과 문인석이 균형을 이루며 놓였다. 이곳에 서서 기묘사화(1519) 때 감옥에 갇혔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은 김정 선생의 마지막 심정을 헤아려본다.
최진하 할머니는 스무 살 때 경주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에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살았는데, 건물과 묘소가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기게 되자, 경주 김씨 선조의 산이었던 지금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최진하 할머니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산을 깎으며 묘소를 만들고 여러 건물을 지었던 그때를 생각해냈다.
“몇 년 두고 소나무 캐내고…. 일꾼들 먹일 돼지 몇 마리를 잡았는지…. 고기 삶아서 일꾼들 주고, 삶은 국물은 건너편 동네 가져다줬어요.”
김 대감 집 하면 ‘잘사는 집’으로 통했다. 밥을 비는 사람들이 대문 안까지 들어와도 쫓아내는 법이 없었고, 늘 밥 한 그릇을 내주었다. 지금도 그때 마음이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음료수 한 병씩이라도 내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서 시월 스무아흐레에 김정 선생의 제사를, 사월 초나흘에는 은진 송씨의 제사를 지낸다. 설과 추석을 합해 한 해 네 번 정도 제사를 지낸다. 문중 사람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도 한다.
- 방축골
평화로운 대청호 한 굽이
한적한 대청호 풍경을 간직하고 싶다면 대청호 수질관리소 주변이 좋다. 대청호 능선을 눈으로 좇으면 풍경에 율동감이 생긴다. 어느 지점에서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 같은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지도를 꺼내 들고 발걸음 따라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찾아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6구간>
- 토방대 마을, 대추나무단지, 법수리 연꽃단지
옛 기억 꽃으로 피어나
토방대 마을은 뒤로 절재산을 앞으로 대청호를 두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몇 마리 개가 너털너털 마을을 돌아다니고, 어떤 개는 편하게 누워 꿀 같은 잠에 빠졌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절재산 뒤로 흐르는 금강으로 버스도 건너다녔다. 이곳에서 오래 산 한 주민이 옛 기억을 떠올린다.
“바로 저 너머가 보은이잖아요. 큰 나무배가 버스를 싣고 금강을 건너갔죠. 그게 정말 볼거리였는데….”
토방대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많이 살았다. 지금이야 집성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에 이곳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지금 토방대 마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농토와 집을 대청호 속에 묻었다. 그리고 원래는 밭터였던 지금 마을로 이사해 살고 있다. 대청호를 앞에 둔 한적한 동네가 좋아 다른 지역에서 찾아와 이곳에 정착한 이들도 있다.
대청호에 묻힌 그리운 옛날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대청호도 토방대 마을의 정겨운 한 풍경이 되었다. 토방대 마을에는 봄이면 온갖 꽃이 피어난다. 벚꽃은 물론, 꽃잔디, 할미꽃, 민들레, 해당화까지.
토방대 마을을 지나 어부동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청호와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만드는 두 곳을 지난다. 대추나무단지, 법수리 연꽃단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보은의 특산물 대추를 재배하는 밭, 갈색으로 익어가는 대추알이 앙증맞다.
법수리 연꽃단지는 연꽃이 피는 여름에 찾으면 좋다.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비가 내린 후 신비로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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