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네에서 ‘달동네’라는 우리말을 만들었다. 달동네는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뜻한다. 70년이 지난 지금 이 단어는 우리가 즐겨 쓰고 소중히 여기는 우리말이다. 잿빛 동네를 덮은 하얀 눈, 그 위에 뜬 달이 아름다워 달동네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민중 운동가로 이름 높은 백기완 작가다. 그가 만든 단어들을 살펴보자면 노동자와 민중을 위로하며 평생을 헌신한 삶의 이력을 느낄 수 있다.

수만 년을 산 이 땅의 니나(민중) 이야기
지난 2월, 백기완 작가가 10년 만에 소설 『버선발 이야기』를 발표했다. 지난해 10시간에 이르는 심장 수술을 받은 뒤 병상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다. 한 자 한 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버선발(벗은 발)’이라는 니나(민중)의 삶을 그렸다. 독재 정권 타파, 민주화 투쟁, 촛불 집회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나란히 한 그의 삶을 떠올리면 니나가 주인공인 이유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런데 백기완 작가가 들려주는 니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버선발 이야기』 라는 이름이 참으로 뜻깊게 느껴진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는 글을 아는 사람, 지식인, 돈이 있는 사람들의 것으로 가득 차 있어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가 바로 니나요. 그래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 이야기를 쓴 거요.”

말은 있었어도 글이 없던 니나의 삶을 보여 주려고 백기완 작가는 한자와 외래어가 없는 순우리말 표현으로 소설을 썼다. 달동네, 동아리, 새내기 등 다양한 우리말을 일상생활에 정착시킨 그이지만 니나가 썼던 말을 끄집어내기까지 들인 공은 상당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소설로 처음 접하는 니나들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말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버선발 이야기』가 그의 것이 아니고, 니나들의 이야기이므로 니나가 쓴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10년 전부터 짬을 내 조금씩 적은 니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빛을 볼 수 있었다.
니나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말

백기완 작가는 순우리말을 즐겨 써 온 작가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안타까워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늘 순우리말을 많이 써 왔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기억을 들려줬는데, 황당하게도 우리말을 썼다가 사람들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이야기다. 유년 시절, 동네 꼬마가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고 “속꽂이(다이빙) 한번 잘하네.”라고 말했다가 애들에게 꿀밤 맞은 적도 있고, 한국 전쟁 때 <달동네 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주변 사람에게 돌렸다가 맞은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달동네 대신 ‘하꼬방촌’이라는 일본말이 있었는데, 일본말을 싫어하는 것을 보니 빨갱이가 분명하다며 경찰들이 때린 것이었다. 또 유신 정권 때 남산 제1터널 건설 당시 신문 방송에서 터널이란 말이 자주 나오길래 ‘맞뚜레(터널)’라는 단어를 권했다가 조국 근대화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던 말을 썼을 뿐이오. 나는 국문학자도 아니오. 한글학자도 아니오. 우리말 쓰기 운동도 한 적이 없소. 우리말을 많이 쓰려고 애쓰는 사람일 뿐이오. 우리말로 여러 번 글을 쓰고, 강연을 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것도 경험했소. 우리말 쓰기 운동이나 학교 교육으로 우리말이 정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진짜 우리말을 쓰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오.”
백기완 작가는 단순히 ‘우리말이 아름답다’라고 강조하기보다 우리말을 꼭 써야 하는 이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반만년 동안 수천만 명이 쓴 우리말은 곧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며, 우리말이 사라지는 것은 문화와 문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자료를 찾을 때마다 서재에 있는 낡고 두꺼운 국어사전을 꺼내 든다는 그는 국립국어원에서 사전을 만들고 우리말을 널리 쓰도록 힘쓰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눈길을 돌려야 하는 것은 니나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우리말이라고 강조했다.
니나 백기완 작가가 알리고 싶은 우리말 세 단어
백기완 작가가 <쉼표, 마침표.>에 꼭 소개하고 싶은 말 세 개가 있다고 한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길을 내자’는 뜻의 ‘아리아리(파이팅)’, ‘벗이 나래를 폈다는 말로 세상 사람 모두가 벗이요, 이웃이다’라는 뜻의 ‘벗나래(세상)’, ‘새로운 것이 떴다’는 뜻의 ‘새뜸(뉴스)’이다. 국어사전에는 없는, 백기완 작가가 제안한 말이지만 왠지 정감이 갔다.
“기록에 있어야 우리말인 줄 알죠. 그런데 시골에 가면 신기한 우리말이 많아요. 1954년, 농민운동을 할 때 이야기인데 폭풍 치는 동해안에서 한 할아버지와 제가 서 있었어요.
그분이 파도를 ‘몰개’라고 하더군요. 또 예전에 우리 집 일을 도와줬던 경상도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고문을 받아 누워 있는 나를 보러 문익환 목사와 찾아왔어요. 문 목사가 나더러 현미밥을 먹으면 후유증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경상도 아주머니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멥쌀 대신 ‘매재미쌀’이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거예요. 한글학자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런 아름답고도 함축미가 들어 있는 우리말들을 찾아내서 알리고, 생활 속에서 자주 쓰도록 하는 게 우리말을 가꾸는 길이라고 생각하오.”
그는 최근에 순우리말로 쓴 세월호 추모 연작시「갯비나리」가 창작 음악극으로 공연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는 세월호가 가라앉아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의 뜻을 기리고자 공연 이름을 <쪽빛의 노래>라고 붙였다.

물감을 만드는 데 쓰이는 풀, ‘쪽’은 썩은 물이나 환경 파괴 물질이 들어오면 걸러 내는데, 이때 말갛게 맑아지는 빛을 ‘쪽빛’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참혹하게 바닷속에 갇혀 꽃다운 목숨을 잃었지만 한없이 맑아지는 자기 빛을 되찾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집채만 한 몰개가 내 마음을 덮쳤다. 그가 말하듯 우리말을 자주 쓰면, 그 순수한 우리말이 말들을 걸러 내는 쪽빛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까마득하거나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리아리하면 된다’ 백기완 작가가 알려 준 우리말로 문장을 속으로 만들며 대화의 매듭을 지었다.
글: 고승희
사진: 김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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