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우리말을 여행하다 - 문학과 우리말 사이를 따라 걷다(남원편)

이산저산구름 2019. 4. 10. 11:17


우리말을 여행하다
우리말을 여행하다

 봄바람을 맞으며 거붓이 걷기 좋은 남원은 책과 함께하면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춘향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대하소설 혼불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쁜 일상에 쫓겨 책을 멀찍이 두던 필자를 다시금 문학 세계로 이끈 남원으로 함께 떠나 보자.

최명희 작가의 혼이 담긴 혼불문학관

 혼불문학관에 가려면 남원역에서 523번 버스를 타고 노봉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한 시간 정도 창가에 앉아 햇살을 느끼며 끄덕끄덕 졸다 보면 정류장에 도착한다. 5분 정도 걸어 가면 마침내 혼불문학관 입구가 나오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한옥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혼불문학관은 최명희 작가(1947~1998)19804월부터 199612월까지 17년 동안 월간 신동아에 연재했던 대하소설 혼불을 기념하고자 세운 곳이다. 이곳에는 작가의 유품, 신문 연재 자료 모음과 함께 소설 혼불에 등장하는 장면들로 표현한 실사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와 함께 소설 줄거리를 설명하는 음성 해설도 제공되어 소설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

 

 문학관 안내 자료 책자에 담긴 작가의 말에 적힌 내용이다. 최명희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얼마나 많은 고뇌를 새겨 넣었을지 상상하니 어쩐지 아련하고도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오랜 감동으로 남을 작품에 담을 말을 벼린다는 것 역시 우리말을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소설의 제목인 혼불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을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이 혼불은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종발만 하며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다음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혼불이라는 말이 정말 있느냐, 그리고 조어(造語)가 아니냐, 그리고 참 뜻은 좋고 상징적인데 얼른 실감이 안 된다, 무슨 뜻이냐 이렇게 물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질문에 놀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냥 혼불이라는 말이 몸에 익어 있었거든요.1)

 이렇듯 혼불에서는 방언이나 낯선 우리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최명희 작가가 화려하게 드러나지도 않았으면서 그러나 아주 아련한 어떤 아름다움을 표시하기에 알맞다고 언급하며, 소설 속 인물인 강실이의 외모를 설명했던 아리잠직하다는 말도 새롭지만, 여운처럼 입에서 맴도는 맛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스란히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 옴시레기를 찬찬히 되뇌면 귀여운 어감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낱말들을 곱씹다 보니 필자의 고향 사투리가 떠올랐다. 내 고향 사투리도 남원 방언만큼이나 정겹고 아름다웠을 텐데 왜 여태껏 몰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고향 사투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추억과 온기들이 함께 돋아나는 것 같았다.

 문학관에서 나오면 혼불의 주요 배경지들을 돌아볼 수 있다. 최명희 작가는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생전에 노봉마을에 자주 드나들며 작품 소재들을 발굴했다고 한다.

 문학관 맞은편에 있는 청호 저수지는 부족한 농업용수를 보충하려고 만든 저수지다. 최명희 작가의 조상이 100년 전에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 저수지는 오늘날까지도 그 고즈넉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소설에서 청암부인이라는 인물이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맥을 가두고 백대천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리고자 만든 곳으로 그려진다. 봄바람을 맞으며 저수지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천추락만세향, 말 그대로 천 번의 가을 동안 즐겁고 만세 동안 복을 누릴 것만 같은 상쾌함이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문학관 옆에는 새암바위가 있다. 새암바위라는 이름은 혼불이 새암2)을 이루어 위로와 해원3)의 바다가 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아 최명희 작가가 붙인 것이다. 문학관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니 혼불에 담긴 아름다움과 애련함을 느껴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노봉마을 이곳저곳에서혼불에 등장한 배경지를 만나 볼 수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노봉마을도 슬쩍 걸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랑 이야기와 함께 걷다. 춘향테마파크

 춘향테마파크는 남원 시내와도 가깝다. 남원 시민들이 가볍게 나들이하러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찾은 날은 평일이었지만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춘향테마파크는 이름 그대로 고전 소설 춘향전을 주제로 한 공원이다. 영화 촬영장 같은 느낌을 주는 이곳은 실제로 임권택 감독이 영화 춘향뎐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춘향과 몽룡이 처음 만나는 만남의 장부터 사랑을 맹세하는 맹약의 장, 두 주인공이 첫날밤을 보내고 이별하는 사랑과 이별의 장, 춘향이 옥살이 후 몽룡과 재회하는 시련의 장, 마지막으로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축제의 장까지 모두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관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춘향전을 잘 모르는 아이들도 더 실감 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밖에 옛 그네를 비롯해 다양한 조선 중기 가구들이 전시돼 있어 당시 생활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곳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을 꼽자면 춘향테마파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단심정을 들 수 있다. 춘향이 몽룡을 떠나보내고 돌아오길 기다렸던 이곳에서는 남원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남원의 봄 경치를 눈에 담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봄바람에 취해 남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가벼운 산책을 한 것 같은데 어느새 필자의 마음은 아름다운 문학들에 젖어 있었다. 특히 최명희 작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혼불문학관은 언젠가 다시 들러 보고 싶은 곳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그가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사진: 이예슬
참고: 남원시 문화 관광 해설 자료, 혼불 문학관 안내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