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우리말
맛의 말, 말의 맛
‘쌤’과 ‘사라다’의 가르침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 시내에 자리 잡은 북한의 한 호텔, 이 호텔을 찾은 것은 순전히 북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서이다. 푹푹 찌는 여름이니 심심하면서도 시원한 평양냉면이 제격이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펼쳐 든 차림표의 낯선 표기가 눈에 들어온다. 쌀라드? 다른 페이지에는 똑같은 음식이 ‘사라다’로 적혀 있다. 북한의 전통 음식을 먹으려고 들어왔는데 ‘쌀라드’ 혹은 ‘사라다’가 웬 말인가? 생각해 보니 안 될 것도 없다. 여러 종류의 손님들을 상대하려면 코스 요리도 필요할 테고 코스 요리에 샐러드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북한의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샐러드를 파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표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재미있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본디 서양식의 샐러드는 없었으니 음식과 그 이름 모두를 들여와야 한다. 남쪽에서는 한때 ‘사라다’라고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샐러드’로 자리를 잡았다. 북쪽에서는 ‘쌀라드’라고 했다가 남쪽 손님들이 많이 찾으니 슬쩍 ‘사라다’라고도 적어 놓은 듯하다.
샐러드는 육류 중심의 식단에 부족한 식물성 음식을 가능하면 많이 먹기 위해 곁들이는 음식이다. 채소나 과일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섞고 그 위에 소스나 드레싱 등을 끼얹어 먹는다. 약간의 고기나 견과류가 첨가되기도 하지만 주재료는 역시 푸른 채소와 울긋불긋한 과일이다. 쌉싸름한 채소와 달콤한 과일, 그리고 달고 짠 소스와 드레싱이 어우러지면 입맛도 돋우고 상큼함을 느끼게도 해 준다. 커다란 고깃덩어리에 몇 조각, 혹은 몇 가닥의 채소만 나오는 서양 요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이런저런 채소를 많이 먹는 우리의 식단에서는 굳이 샐러드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작정하고 푸른 채소를 먹기도 한다. 잎 넓은 채소에 온갖 것을 싸서 먹는 쌈이 그것이다. 이 지역의 동포들은 ‘쌤’을 먹는다. 얼핏 들으면 오두막에 산다는 ‘샘 아저씨’가 떠오르겠지만 우리가 흔히 ‘쌈’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쌈’은 당연히 ‘싸다’에서 온 말이다. 과거에 과부를 몰래 데려오기 위한 ‘보쌈’이나 오늘날 삶은 돼지고기를 채소로 싸 먹는 ‘보쌈’ 모두 결국 보자기나 채소로 무엇인가를 싸는 것이니 같은 기원의 말이다. 이 지역에서 왜 ‘쌈’이 ‘쌤’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라다’라고 부르든 ‘쌤’이라고 부르든 두 음식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두 음식은 어떻게든 채소를 많이 먹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샐러드는 여러 채소를 섞어서 먹는다. 각자 따로 노는 채소를 소스나 드레싱을 써서 하나로 엮는다. 우리 식으로 치면 무침 비슷하기도 하다. 반면에 쌈은 채소에 여러 음식을 싸서 먹는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든 큰 잎에 싸서 한 입에 넣으면 쌈이 되는 것이다. 채소를 섞고 그것을 다시 소스나 드레싱으로 엮어 내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음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고, 갖은 음식을 잎 넓은 채소로 싸서 한입거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음식이 되지만 잘라져서 다시 모이는 것과 본래의 잎으로 나머지를 모두 싸 내는 것이 다르다.
샐러드는 미국의 성립 및 발전 과정과 관련해서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샐러드를 만들기 위한 그릇인 ‘샐러드 볼(Salad Bowl)’이 그렇다. 알다시피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 다국적 출신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엮어 ‘하나의 미국’을 건설하는 것이 지상 과제이다. 초기에는 모든 것을 녹이고 걸러 순수한 쇠로 만들어 내는 ‘용광로(Melting Pot)’ 모델이 제시됐었다. 그러나 모두를 녹여 하나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적당하지도 않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 뒤로 나온 모델이 바로 샐러드 볼 모델이다. 갖가지 채소가 본래의 색과 맛은 유지하되 커다란 샐러드 볼에 담겨 소스와 드레싱에 의해 하나의 음식으로 엮인다는 뜻이다.
샐러드 볼 모델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각각의 존재가 모두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샐러드이다. 미국이라는 땅덩어리, 혹은 국가는 샐러드 볼이 되어 그들을 담아낸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재료이지만 소스와 드레싱으로 엮이듯이 미국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로 하나가 된다. 지나치게 이상적일 수 있지만 이 모델이 지향하는 바대로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우리의 음식 쌈 또한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크다. 쌈 속에 무엇이 들어가도 좋다. 식은 밥이지만 쌈 속에서 양념장과 어우러지면 특별한 맛을 선사한다. 쌈에 고기를 얹고 마늘과 고추를 비롯한 온갖 재료를 함께 싸서 먹으면 입속에서 어우러진다. 어떤 재료, 어떤 음식이든 결국 쌈으로 하나 되어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가면 섞이고 어우러지면서 먹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이것이 쌈이다.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역시 출신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미국처럼 태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 집단 내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다른 생각으로 편을 가르고 극단적인 대립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쌈 모델’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이룰 만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출신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더라도 넓은 쌈에 싸여 하나가 된다면 샐러드 볼보다 더 나은 우리 사회의 통합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차이는 쌤으로는 아이 좋잼까?”
“저 딱딱한 종이로 채소를 싸 먹는다고? 안 부서져? 쌀로 만든 거라고?”
“한국 음식 중에 바다 냄새 나는 그 시커먼 종이가 제일 싫었어요.
몽둥이 같이 만들어서 썰어 주는 그건 더 싫었고요.”
옌볜에서 유학 온 대학원생이 쌈 채소 더미에 섞여 있는 청경채를 보고 한마디 한다. ‘유차이’는 ‘유채(油菜)’인데 한자도 같이 쓰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유채가 아니다. ‘쌤’은 많이 먹어 본 친구이지만 청경채 특유의 맛과 향 때문에 쌈으로 먹는 것이 낯선 듯하다. 텔레비전에 월남쌈이 소개되는 것을 보던 어른이 한마디 던지신다. 라이스페이퍼라고 말해줘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한다. 쌈에 밥을 싸서 먹던 이가 밥에 채소를 싸서 먹는다고 하는 설명을 들으니 그럴 법도 하다. 마지막은 김이 낯설었던 멕시코 친구의 말이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구운 김과 소풍날 김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것이지만 김을 처음 보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지금 이런 이들과 같은 땅에서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토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나라 이름으로 뭉쳐야 한다. ‘쌈’의 교훈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입 넓은 채소, 라이스페이퍼, 김 어느 것이든 좋다. 잘 어우러져 하나로 싸이면 된다. ‘쌈’이 주는 교훈을 잊은 채 ‘쌈박질’만 일삼는 사람들은 더더욱 되새겨 봐야 한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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