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멋을 담다 - 조선시대 남자들의 장신구

이산저산구름 2016. 10. 25. 09:58





유행을 놓치지 않았던 남자의 옷
조선시대 여자의 옷이 저고리와 치마가 중시되는 문화였다면, 남자의 옷은 저고리와 바지가 아닌 그 위에 덧입는 큰 옷, 즉 포(袍)가중시되는 문화였다. 요즘은 포에 속하는 일상 옷으로 두루마기만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많았다. 관직자들이 입는 단령(團領), 그 안에 받침옷으로 입거나 따로 겉옷으로 입었던 직령(直領), 답호, 철릭, 창의, 도포, 중치막, 액주름, 소창의 등이 있다. 물론 이들 옷의 형태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대표적인 것이 철릭이다.
철릭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옷인데, 쉽게 얘기하자면 저고리 아래에 주름을 많이 잡은 치마를 붙여놓은 형태이다. 상의는 몸에 맞게 만들고, 치마부분은 옷감을 여러 폭 붙여서 아래 도련(저고리나 두루마기 자락의 가장자리)을 넓게 한다. 그런데 이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은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전체길이는 크게 변함이 없는데 상의가 짧아지고 치마가 길어진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 사대부들이 외출복으로 가장 흔하게 입었던 도포와 중치막의 옆선 모양은 여자 옷인 원삼이나 당의 옆선의 변화와 흐름을 같이 하여, 후기로 갈수록 날렵한 라인이 되면서 중간이 살짝 휘어지는 곡선을 만들어낸다.
흔히 우리가 ‘조선시대’와 ‘유행’하면 여자를 떠올리고 그중에서도 기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남자들도 유행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고금(古今)이나 남녀를 막론하고 통한다.


멋 부리기의 묘미, 살짝 드러내기
유행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던 당시의 사대부들이 대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다양한 겉옷만큼 그와 짝을 이루는 여러 형태의 관모(冠帽), 갓에 장식하는 정자(頂子)와 갓끈, 여러 가지 색실로 짜서 끝에 방울술을 매단 허리띠, 날렵하면서도 기다란 선추(扇錘)를 매단 접부채 등 말이다. 그 중에서도 관모는 관(冠), 모(帽), 입(笠), 건(巾) 등으로 신분과 의식, 용도에 따라 사용했다. 갓의 테 둘레나 모자의 높이는 시대의 유행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후대로 갈수록 테의 크기가 점점 극대화되어 사치스러움을 지적 받기도 했다.


관모 속도 사대부들의 멋을 내는 것에 예외는 없다. 상투관을 착용해 상투가 드러나지 않도록 했으며, 차림을 갖출 때는 상투관 위에 관모를 덧썼다. 상투관은 가죽이나 뿔, 종이 등으로 만들었으며 일반 서민층은 천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갓이 바람에 날려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망건에 달았던 풍잠까지도 섬세하게 신경 썼다. 대모, 마노, 호박, 백옥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풍잠은 ‘닷새를 굶어도 풍잠 멋으로 굶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남자들의 체면을 상징하는 장식품이었다. 또한, 갓의 정수리에 정자 장식으로 올리기 위해 새 모양으로 깎은 옥로와 마노, 수정, 호박, 산호, 밀화 등을 엮어서 턱밑에 길게 드리운 갓끈(貝纓)은 남자 장신구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조선후기 풍속화를 보다 보면 자꾸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장신구라고 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위에 열거한 물품들이 아니다. 바로, 주머니다. 신윤복이 그린 <휴기답풍(携妓踏楓)>을 보자. 바람이 꽤 부는 날인 듯싶다. 기녀를 데리고 단풍놀이를 가는 젊은 사대부는 바람에 갓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고 있고, 기다란 갓끈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멀리 휘날린다. 겉에 입은 중치막의 옷자락도 바람에 흩날린다. 그리고 그 옷자락 사이로 주머니가 보인다. 저고리 고름에 하나를 걸었고, 바지허리끈에 또 하나를 걸었다.
허리춤의 주머니를 찬 모습은 신윤복의 <유곽쟁웅(遊廓爭雄)>에서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웃통을 드러낸 사내의 모습에서 주머니를 어떻게 찼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허리끈을 둘러 묶고, 바지의 넓은 허리말기를 끈 위로 끌어올린 후 밖으로 접었다. 그리고 허리끈에 주머니를 찼다.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주머니는 남색, 붉은색 등 취향에 따라 색을 골라 썼다. 모양도 둥글게 하거나 모나게 해서 개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섬용지(贍用志)』, 『복식지구(服飾之具)』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주머니(佩囊): 갖가지 색의 단(緞)직물로 만든다. 모나고 둥글게 하는 것은 뜻대로 한다. 청색이나 자주색의 실로 끈을 만들어서 허리에 찬다.”
맘에 드는 색의 고급 비단을 골라 원하는 모양대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춤에 찬 채, 길을 걸을 때나 바람이 불 때 옆이 트인 중 치막 자락 사이로 살짝살짝 내비치게 했던 것이다.


멋에 담긴 실용
속에 차서 살짝만 보여주던 주머니는 사대부들의 멋내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멋을 내기 위해 주머니를 찼던 것만은 아니다. 『임원경제지』에는 위 내용에 뒤이어 아래와 같은 소개가 있다.
“주머니: ……속에는 부싯돌이나 족집게 등의 물건을 넣는다.”
부싯돌은 머나먼 원시사회에서부터 인류가 생존을 위해 몸에 꼭 지녀야 하는 도구였다. 게다가 기다란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양반의 권위를 드러내려 했던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한 부싯돌은 필수였을 것이다. 이 부싯돌과 족집게 등 실용을 위한 물건을 주머니에 넣고 윗도리와 아랫도리에 찼다.
주머니를 비롯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장신구는 대체로 장엄하고 무게 있다기보다 여릿여릿하고 날렵한 맛이 난다. 섬세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남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본다면, 유행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동시에 속에 감춰둔 것에서도 멋을 내고 싶어 했던 옛 남자들의 풍류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글‧최연우(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교수, 전통복식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