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한반도 기와 가운데 으뜸 -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수막새'

이산저산구름 2016. 10. 18. 16:25





기와가 지닌 의미와 신라의 기와
기와는 지붕을 덮는데 사용하는 건축 재료로, 중국의 서주(西周)시대부터 제작되었다. 고대 한반도는 중국으로부터 건축 기술과 기와 등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다. 기와는 시대나 지역, 국가의 기호에 따라 독창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와는 건축물의 상부에 위치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다. 옛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로 장식하여 건축물의 위엄을 높이고 재앙을 피했으며,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권2에는 “많은 절이 별처럼 즐비하고, 탑은 기러기들이 날아가는 듯하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경주에 궁궐과 관아 그리고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주 건축물에는 많은 기와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경주 지역 절터에서는 수십만 점에 이르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런 만큼 삼국시대에는 연꽃 문양, 그리고 통일신라 초기에는 동물과 식물 문양 등 다양한 기와가 유행하였다.
신라 기와가 출토된 대표적인 사찰로 영묘사지와 황룡사지 그리고 사천왕사지를 들 수 있다. 세 곳의 사찰은 왕실에서 후원하여 운영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영묘사는 선덕여왕 4년(635년)에 창건되었으며, 이곳에는
<영묘사성전(靈廟寺聖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국가가 관리했다. 그리고 영묘사에는 승려 양지(良志)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흙으로 만든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 벽돌탑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양지는 출신이나 조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선덕여왕 때 활동하였던 유명한 소조(塑造) 전문 장인이었다. 그는 벽돌탑과 소조상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을 능숙하게 제작하였던 위대한 소조장(塑造匠)이었다. 물론 그가 제작하였던 영묘사의 소조상(塑造像)들은 출토되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조화로움 속에 피어난 ‘얼굴무늬수막새’
출토물 중에서도 얼굴을 표현한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는 ‘신라의 미소’라고 불릴 만큼 한반도 기와 가운데 으뜸이다. 이 기와는 현재의 흥륜사에서 출토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곳에서는 영묘지사(靈廟之寺)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영묘사지로 추정된다.
이 기와는 1933년 경주에서 산구병원을 운영하던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가 경주의 율원 고물상에서 구입(1934년)한 것이다. 그 후 1934년 9월 『신라의 옛 기와 연구(新羅古瓦の硏究)』에 소개되었으나, 기와의 행방은 묘연했다. 수십 년이 흐른 1972년 2월, 국립경주박물관 박일훈 관장은 일본으로 출장을 가 기타큐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다나카 도시노부를 찾았고, 그에게 얼굴무늬수막새를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하여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제안하였다. 거듭되는 요청에 다나카 도시노부는 1972년 10월 경주를 방문해 얼굴무늬수막새를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로써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영묘사터에서 출토된 얼굴무늬수막새와 귀면와는 구도가 완벽하고 새김수법이 일반적인 기와들에 비해 수작이다. 또한,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신장상들과 영묘사터 출토 귀면와, 그리고 얼굴무늬수막새는 당시 최고의 소조(塑造)장인이라 할 양지 혹은 그의 유파들이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얼굴무늬수막새는 진흙의 함유량이 일반 기와보다 많고 매우 단단하다. 손수 빚어 만든 까닭에 틀로 찍어 만든 일반 기와와는 달리 좌우 대칭이 맞지 않지만 오히려 이런 자연스러움이 얼굴에 생명력을 부여하였다. 얼굴은 다소 거칠게 표현된 듯 하지만 튀어나온 눈, 코, 입의 양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눈썰미와 도톰한 입술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삼국시대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고졸함도 느껴진다. 우리는 이 기와 한 점을 통해 신라인의 미소와 마주한다.
한편, 무서운 형상의 동물문 기와는 건축물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려는 벽사(辟邪)의 의미에서 무서운 형상으로 제작하였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널리 유행하였다. 하지만 얼굴문양을 새긴 이러한 예는 미륵사지 출토 기와편과 황룡사지 출토 치미(雉尾: 고대 목조건축이나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가 대표된다. 황룡사지 출토 치미는 양 측면이 투구처럼 생겼고, 문양의 구성은 깃털을 연상케 하는 여러 단(段)과 연화문 그리고 사람 얼굴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특히 사람 얼굴 표현에서 수염이 난 남자와 수염이 없는 여자를 함께 새겼다.
경주의 여러 유적지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은 파편일지라도 그 유적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통일신라 시대 기와는 신라인들이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현실세계에 나타내고자 건축물을 아름답게 장엄하였던 결정체이다.


글+사진‧김유식(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