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UNESCO 세계기록유산 전시

이산저산구름 2016. 9. 22. 11:13

UNESCO 세계기록유산|――······· 서예 서화작품

 

 

 

UNESCO 세계기록유산 전시

 

 

2016 世界記錄總會’가 세계 각국에서 기록관리 전문가와 정책담당자, 관련산업 인사 등이 9 5일부터 10일까지 서울 三成洞 KOEX에서 열렸다.

195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첫 총회를 시작으로 4년마다 각국을 돌며 열리기 때문에 ‘記錄올림픽’이라고도 부르며 이번 서울총회는 제18차 총회로 100여개국에서 2,000여명이 참가하여 각국의 기록관리 성과와 효과적인 관리?보존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2016 세계기록총회’기간 중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록문화전통을 역사상 실제 ‘기록’을 통해 만나보는 기록전시회가 6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3 D홀 앞 복도에서 열렸다.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은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소중한 歷史的 記錄物로 世界記錄遺産사업은 人類의 文化를 계승하는 중요한 기록유산이 未來 世代에 전해질 수 있도록 保存?保護하기 위하여 UNESCO 1992년에 시작하여 1997년 첫 登載가 시작되어 2년마다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선정대상을 결정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07國의 기록유산 348件이 등재되어 인류의 기념비적 기록이며, 東西古今의 지식과 지혜의 源泉이다.

 

세계기록유산은 현재 전 세계에서 348건이 登載되었으며 各國의 登載件數는 독일(21)가장 많고, 다음은 폴란드와 영국( 14), 우리나라는 13件으로 세계 4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를 기록하고 있다.

 

UNESCO 지정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구분

기록유산명

등재연도

  

1

훈민정음(訓民正音)

1997.10

국보 70(1962)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997.10

국보 151-1/2/3(1973)

3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2001.09

 

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2001.09

국보 303(1999)

5

조선왕조 의궤(朝鮮王朝儀軌)

2007.06

보물1901-1(2016)

6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高麗大藏經板 및

諸經板)

2007.06

국보 32(1962)

7

동의보감(東醫寶鑑)

2009.07

국보 319-1(오대산사고본),

319-2(적상산사고본)(2015)

8

일성록(日省錄)

2011.05

국보 153(1973)

9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2011.05

 

  10

난중일기(亂中日記)

2013.06

국보 76(1962)

  11

새마을운동 기록물

2013.06

 

  12

한국의 유교책판(儒敎冊板)

2015.10

 

  13

KBS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2015.10

 


 

지난 09.06()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을 관람하면서 찍은 사진을 올린다.


                             2016.09.10  孤 山  朴 春 慶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사진

 

 

(01) 대한민국의 세계기록유산 전시장


 

(02) 훈민정음 해례본-불조직지심체요절(오른쪽)

=訓民正音 解例本  -국보 제70- *原本所藏; 서울 城北洞 澗松美術館

이 책은 새로 創製된 훈민정음을 王命으로 鄭麟趾 등 集賢殿 學士들이 중심이 되어 世宗 28(1446)에 만든 漢文解說書로 책이름은 ‘訓民正音’, 解例가 붙어 있어 ‘訓民正音 解例本’ 또는 ‘訓民正音 原本’이라고도 하며, 全卷 33 1책의 木版本이나, 2장은 1940년에 復元한 것이다.

<世宗實錄>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1443) 王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1446) 頒布한 것으로, 이 책에서 序文과 함께 정인지가 謹作 했다는 解例를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 <훈민정음 해례본> 購入 및 保存 逸話

1943 6월 翰南書林에서 澗松 全鎣弼은 古書仲介人으로부터 慶北 安東에

<訓民正音 解例本>이 나왔는데, 책 주인이 책값으로 1,000(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간송은 중개인에게 11천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만원을 전하고 천원은 수고비로 받으라고 하면서"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며 마침내 전형필의 손에 훈민정음 원본이 들어오게 되었다.  (*: 줄 형)

훈민정음 해례본은 당시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었으며 日帝가 한글사용을 철저히 禁止하고 있던 시기로 만약 이 책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朝鮮總督府가 알게 되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할 것이 뻔했다.

한 해 전인 1942년 朝鮮語學會事件으로 한글학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가고,

한글 彈壓政策을 펴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澗松은 寶物에 해당하는 훈민정음 貴重本을 손에 넣었지만 訓民正音이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다가 1945년 光復 후에야 세상에 공개했으며, 1950 6?25전쟁이 발발하자 澗松은 애써 모아둔 文化財들을 모두 그대로 두고 서둘러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훈민정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챙겨갔으며, 혼란스러운 피난길에서도 혹시 잃어버릴까?

해서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고 한다.

澗松 全鎣弼의 投資와 노력으로 訓民正音을 지킨 것이다.

 

 

=佛祖直指心體要節  현존하는 世界最古의 金屬活字本-

 高麗 恭愍王 21(1372) 僧侶 景閑이 부처와 祖師의 偈頌?法語 등에서 禪의 要諦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佛書이다. (*: 쉴 게)

 手稿本에 직접 抄錄한 것으로 상?하 2권으로 정식 書名은 <白雲和尙?錄佛祖直指心體要節> 이나 흔히 <불조직지심체요절>, <直指心經>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 '부처의  말씀'이나 '불법의 진리'를 담은 책이지만, 이 책은 祖師들의 法語 등을 모아놓은 책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  (*?: 노략질할 초) 판본은 景閑이 入寂한 3년 뒤인 고려 禑王 3(1377) 7월 淸州牧 郊外에 있던 興德寺에서  金屬活字인 鑄字로 찍어낸 것이 初刊本으로 상하 2권 중 하권 1책만 전하며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鑄字本은 활자의 鑄造術과 組版術이 미숙했던 고려시대에 官署가 아닌 지방의 사찰에서 鑄成하여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활자를 木活字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粗雜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고려 鑄字本 중 유일하게 전래된 活字本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創案하고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實證하여 그 矜持를 세계에 과시한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03) 일성록-승정원일기(오른쪽)

=日省綠  -국보 제153-  *原本所藏; 서울대학교 奎章閣 韓國學硏究院

英祖 36(1760) 1월부터 隆熙 4(1910) 8월까지 조선후기 151년간의 國政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日記體의 年代記이다.

<日省綠>의 母胎가 된 것은 正祖가 世孫시절부터 자신의 言行과 學問을 기록한 일기인 <尊賢閣日記>, 정조는 [論語]에서 曾子가 말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자신을 反省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였다.

<日省錄> <朝鮮王朝實錄>?<承政院日記>?<備邊司謄錄>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官撰 年代記로 다른 연대기에는 수록되지 않은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상황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史料로서 가치가 크다. (*: 베낄 등)

 

=承政院日記  -국보 제303- *原本所藏; 서울대학교 奎章閣 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王命의 出納을 관장하던 承政院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筆寫本 3,243冊이다.

<承政院日記>는 조선 초기 世宗 때부터 작성되었으나 朝鮮前期의 일기는 壬辰倭亂, 李适의 亂 등으로 燒失되어 현재는 仁祖 1(1623) 3월부터 隆熙 4(1910) 8월까지 288년간의 일기만 전해지며 조선후기에도 궁궐 화재로 <승정원일기>가 소실된 경우들이 있어 그때마다 <朝報>?<春坊日記>?<日省錄> 등을 참고하여 補完하였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자료인 만큼 국왕의 動靜과 관련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며 특히 국왕과 신하들의 國政論議 내용, 국왕에게 올린 上疏文 내용 등이 縮約되지 않고 그대로 收錄되어 있어 實錄編纂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朝鮮後期史 연구에 1차 史料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04) 동의보감-난중일기(오른쪽)

=東醫寶鑑  -국보 제319-1-   *原本所藏; 국립중앙도서관

<東醫寶鑑>은 龜岩 許浚(15391615)이 光海君 2(1610)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醫書와 臨床醫學的 體驗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韓醫書이다.

宣祖는 1596년 許浚과, 楊禮壽, 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醫書를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丁酉再亂으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허준이 14년 동안 精力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한 醫書가 <東醫寶鑑>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撰述한 醫書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初刊本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光海君 5(1613) 11월 內醫院에서 木活字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 25책이다.

내용은 目錄 2, 內景篇 4 26, 外形篇 4 26, 雜病篇 11 38, 湯液篇 3 17, 鍼灸篇 1 1조 등 모두 25 108조로 구성되었다.

<동의보감>은 조선뿐만 아니라 中國과 日本 등에도 광범위하게 流布되어 明末 ?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乾隆 28(1763)이후 수 차례 간행되었으며, 日本에서도 享保 9(1724)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 11(1799)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再版本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東洋醫學의 必讀書가 되었다. (*: 침 침 *: 뜸 구)

東醫寶鑑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19-1호 五臺山史庫本(2525) 外에도 국보 제319-2호 赤裳山史庫本(2525), 국보 제319-3

太白山史庫本(17 17), 忠北 有形文化財 제345(3)가 있다.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국보 제76- *원본소장; 牙山 顯忠祠

亂中日記의 國寶指定 명칭은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壬辰倭亂(15921598) 때 李舜臣(15451598)이 親筆로 작성한 일기로 年度 別로 7권이다.

全羅左道 水軍節度使를 지내던 때 곧 倭賊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麗水를 중심으로 배를 建造하고 軍備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宣祖 25(1592) 임진왜란이 勃發하자 玉浦大捷,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泗川海戰, 唐項浦海戰, 閑山大捷 등 곳곳에서 戰勝을 거두었고, 丁酉再亂 때에는 鳴梁大捷 등에서 승리하였다.

李舜臣 戰死後 1604년 宣武功臣 1등과 領議政에 追贈되고, 忠武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지극한 충성심과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民族史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난중일기의 構成은 제1壬辰日記로 선조 25(1592) 5 1~선조 26(1593) 3월까지 27, 2癸巳日記는 선조 26(1593) 5 1~ 9 15일까지 30, 3甲午日記는 선조 27(1594) 11~728일까지 52, 4丙申日記선조 29(1596) 11~10 11일까지 41, 5丁酉日記는 선조 30(1597) 41~10 8일까지 27, 6권은丁酉日記 續으로 선조 30(1597) 8 4~선조 31(1598) 1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으며, 7권은 戊戌日記로 선조 31(1592) 9 15~10 7일까지 8매로 구성되어 있다.

7년간의 亂中에 倭賊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代代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 <忠武公全書>에 수록된 亂中日記의 草本으로, 내용 중에는 水軍統制에 관한 軍事秘策과 戰況을 보고한 狀啓의 草案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당시 軍事制度에 대해서도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05) 軌.  조선시대 王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내용을 정리한 기록.


              

      

(06) 華城行幸圖, 8폭병풍 제5西將臺夜操圖(서장대에서 군사훈련 하는 장면)


=華城行幸圖 屛風  -보물 제1430  *원본소장: 삼성미술관 리움/서울 龍山區 漢南洞<화성행행도병풍>은 正祖가 부친 思悼世子와 모친 惠慶宮 洪氏의 回甲을 맞아 정조 19(1795) 2 9일부터 8일간에 걸쳐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華城의 顯隆園을 行幸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 병풍이다.

각 폭의 내용은 ‘華城聖廟展拜圖’, ‘洛南軒放榜圖’, ‘奉壽堂進饌圖’, ‘洛南軒養老圖’, ‘西將臺夜操圖’, ‘得中亭御射圖’, ‘還御行列圖’, ‘漢江舟橋還御圖’ 등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 방 붙일 방 *: 반찬 찬)

당시 최고의 畵員으로 奎章閣 差備待令畵員이었던 兢齋 金得臣, 有春 李寅文 등이 그렸는데, ‘봉수당진찬도’ 등은 기존의 전통적인 構圖方式을 따르고 있으나,

‘환어행렬도’에서 檀園 金弘道의 平生圖에 나타나는 ‘之’자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한강주교환어도’에서도 기존 宮中行事圖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화면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하고 諧謔性이 있어 당시의 풍속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세련된 색채를 구사하고 묘사가 매우 정교하다.

이 그림은 대표적인 역사적 기록화로서 풍속화적인 성격도 강한데, 그림으로서만이 아닌 史料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며 묘사, 색채 면에서 매우 우수하여 18세기 최고의 記錄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07) 가례도감의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오른쪽)

=嘉禮都監儀軌   ?소장; 규장각도서

조선시대 국왕 및 왕세자의 婚禮儀式 절차를 적은 책으로 國王이나 王世子가 결혼할 때 임시로 설치한 嘉禮都監에서 儀式 전반을 관장하고, 그 절차를 일일이 기록하여 <嘉禮儀軌>라 했으며 儀軌는 王室의 중요행사가 있을 때마다 작성하였는데, 행사의 날짜? 事例?憲章?제작?史體?簿規 등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英祖貞純王后 嘉禮都監儀軌

正妃 貞聖王后와 死別한 英祖가 三年喪이 지나자 英祖 35(1759) 51세 年下의 繼妃인 貞純王后(당시 13)와의 嘉禮에 관한 의궤로, 宮中 女性 특히 王妃의 결혼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자료로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宮으로 가는 50面의 <親迎班次圖>에는 379필의 말과 1,299녕의 인물이 등장한다.

 

*貞純王后는 慶州 金氏 鰲興府院君 漢耉의 딸로 親庭이 老論의 中心家門이었음에 비해 思悼世子는 少論에 기울어져 노론에 비판적이었으며 1762년 英祖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1800년 純祖가 11세로 즉위하자 垂簾聽政하면서 스스로 여자국왕[女主?女君]을 칭하고 正祖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思悼世子에게 동정적이었던 時派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으며 정조의 異腹동생 恩彦君 ?과 정조의 친모 惠慶宮 洪氏의 동생인 洪樂任 등을 처형하고 다음해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茶山 丁若鏞 등의 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正祖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 자라 오 *: 늙을 구 * ?: 제사 지낼 인)


 

(08) 조선왕조실록 影印本(太祖實錄)

朝鮮王朝實錄 鼎足山史庫本  -국보 제151-1- 

         *원본소장: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朝鮮王朝實錄>은 조선 太祖에서부터 哲宗 때까지 25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記述)로 기록한 책이다.

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는 鼎足山史庫本을 기준으로 볼 때 完帙 분량이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실록 편찬은 국왕이 昇遐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으며 완성된 實錄은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書庫인 史庫에 보관하였다.

朝鮮前期에는 漢陽에 있던 春秋館과 忠州?星州?全州史庫에 보관했는데, 壬辰倭亂을 거치면서 全州史庫本 이외의 실록은 燒失되어 전쟁이 끝난 후 宣祖 36(1603) 7월부터 1606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再 刊行하여 춘추관, 江華 鼎足山, 太白山, 妙香山(뒤에 赤裳山으로 移轉), 五臺山 등 5곳의 사고에 보관하였으며 이후 실록은 5부씩 간행되어 각 史庫마다 한 부씩 보관하였다.

奎章閣 所藏 鼎足山史庫本은 조선전기의 全州史庫本이 이어진 것이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日帝가 서울로 移管, 奎章閣圖書로 편입되어 朝鮮總督府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 京城帝國大學 도서관으로 移管되고,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정족산사고본 이외 <조선왕조실록>은 아래와 같자.

=朝鮮王朝實錄 太白山史庫本(국보 제151-2). 848

                                *원본소장; 국가기록원 정부기록보존소 釜山支所

=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국보 제151-3), 74

                                *원본소장;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朝鮮王朝實錄 其他散葉本(국보 제151-4), 21

                                *원본소장;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09) 朝鮮王朝實錄의 또 다른 모습


 

(10) 세종장헌대왕실록 오례

世宗莊憲大王實錄은 世宗의 在位期間(1418.08~1450.02) 31 7개월간의 國政全般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총 163 154책으로 구성되어있는 活字本으로

世宗實錄이라고도 한다.

 

五禮는 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에 관한 禮式 儀注로 成宗 때 완성된 國朝五禮儀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이며, 鄭陟, 卞孝文 등이 편찬하였다.


 

(11) 선조소경대왕실록 수정본-선조소경대왕실록(오른쪽)

=宣祖昭敬大王實錄(사진 오른쪽)

선조의 在位 41년간(1567.07~1608.01)의 實錄 221권으로 光海君 8(1616) 奇自獻 등이 편찬하고 實錄廳에서 간행한 宣祖實錄으로 原名은 <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이 실록은 방대한 분량이나 宣祖 25(1592) 壬辰倭亂 이후 16년간의 기록이 대부분으로 <선조실록> 전체 221권 중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 3월까지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는 195권이나 된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春秋館日記>·<承政院日記>·<備邊司謄錄> 등 국가 기록이 戰禍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며 이에 선조 28(1595) 經筵官 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史官으로 하여금 기억을 기록해 제출하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전의 朝報·政目과 개인의 일기 및 野史 등을 춘추관에 納入케 할 것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는 戰亂을 치르는 과정에 사건이 많은 데다 자료보관이 가능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나 기사가 조잡하고 黨派 관계로 公正한 입장을 보이지 못한 것이 많아 역대 실록 가운데 가장 質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宣祖昭敬大王實錄 修正本(사진 왼쪽)

宣祖昭敬大王實錄이 임진왜란 이후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나 기사가 조잡하고 黨派 관계로 서술이 공정하지 못하여 歷代 實錄 가운데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西人 李珥?成渾?朴淳?鄭澈 및 南人 柳成龍 등에 대해 없는 사실을 꾸며 비방하는가 하면 李山海, 李爾瞻 등 北人 일파에 대해서는 지나친 칭찬을 하여 是非 및 善惡이 많이 轉倒되었다. (*: 너 이 *: 볼 첨)

仁祖反正 후 西人이 집권하자 곧 수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선조수정실록>편찬하게 되었다.


             

           

(12) 조선왕조실록의 엄격한 관리


 

(13) 기록의 보물창고 <조선왕조실록>


 

(14) 朝鮮王朝實錄書庫-國家記錄院 釜山記錄館


 

(15) 조선왕조실록 편찬 과정


 

(16) 史官과 史草


 

(17) 인조 무인 사초

=仁祖戊寅史草는 인조 때 史官이 작성하여 집안에 보관했던 家藏史草의 원본으로 37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636 6 13~9 17일까지의 사초를 날짜 별로 1책씩 묶었으며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8) 광해군일기-광해군일기 중초본(오른쪽)

15대왕 光海君 재위 15년간의 실록 筆寫本 187 64책으로 1608 2~1623 3월까지의 施政을 年月日의 순서로 기록한 것으로서 광해군이 廢位되었기 때문에 실록이라 하지 않고 日記로 命名하였다.

仁祖 2(1624) 6월 南別宮에 纂修廳을 설치하여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丁卯胡亂으로 중단하였다가 1632 2월에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완성하였다

찬수관은 尹昉?李廷龜?韓瑞鳳?? 등이며 편찬 후에도 물력의 부족으로 수개월분만을 인쇄하였으며, 나머지는 正草本을 여러 번 등사하여 보관하였으나 1634 1월부터 5월까지 등사한 정초본도 2부에 지나지 않아 中草本을 洗草하지 않고 64책으로 엮어 太白山史庫에 보관하였다.


 

(19) 현종대왕실록-현종대왕개수실록(오른쪽)

=顯宗大王實錄

현종의 재위 15년간(16591674)의 실록으로 활자본, 22 23책이다.

肅宗 3(1677) 許積·金大運·金錫胄·柳命夏·吳挺緯 등이 찬수하고 실록청에서 편찬한 卷頭書의 이름은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이며, 부록 1책에는 行狀·哀冊·諡冊 및 誌文 등이 실려 있다. (*: 빼어날 정 *: 시호 시)이 실록은 鼎足山本과 太白山本이 있으며 정족산본은 규장각에,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다.

 

=顯宗大王改修實錄

18대 왕 顯宗 때의 역사기록인 <顯宗實錄>을 수정한 책 28 29책으로 정식이름은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이다.

3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왕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錯亂?疎略한 부분이 많고, 南人의 主導로 편찬했기 때문에 西人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肅宗 6(1680) 庚申大黜陟으로 西人이 南人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判校 鄭勘의 건의로 實錄改修廳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하였다. (*: 내칠 출)

이 개수실록도 현종 재위 15 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編年體로 담았으며

부록 1책에는 개수된 현종의 行狀?哀冊文?諡冊文?崇陵誌를 수록하여

개수실록은 <현종실록>과 함께 현종대의 史實은 물론,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근본적인 자료의 하나가 된다.


 

(20) 조선왕조실록의 보존, 史庫


 

(21) 奉安儀式-洗草와 洗草宴


 

(22) 포쇄(曝?)  (*: 쬘 폭 *?: 쬘 쇄)


 

(23) 태백산실록 포쇄제명-세초연등록

=太白山實錄 曝?題名 

태백산 사고의 實錄을 포쇄한 날짜와 이를 담당한 春秋館 官吏의 職名과 姓名을 기록한 책.

 

=洗草宴 謄錄

<實錄)>을 완성한 후 草稿를 紫霞門 밖의 개천에서 洗草한 뒤 참여한 관원들에게 열어준 잔치를 그대로 기록하여 만든 책.

 

*洗草: 紫霞門 밖 造紙署에서 史草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운 데서 유래된 것으로 종이가  귀하던 때이므로 글자가 지워진 종이는 다시 제지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세초가 끝나면 洗草宴이라는 연회를 베풀었다.

조선 초기에는 세초하는 일이 없었으며 光海君 때 <宜祖實錄>을 편찬하고 나서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는 사초의 流出을 막고, 是非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24) 숙종대왕실록

=肅宗大王實錄: 19대 肅宗(在位; 1674.08~1720.06)의 실록. 65 73.

英祖 4(1728) 李光佐 등이 著作하여 간행한 <숙종실록>의 原標題는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이다.

景宗 즉위년인 1720 11~1728 3월에 걸쳐 편찬하였으며 실록에 실린 기사의 분량이 많은데다 편찬 도중 老少黨論의 政變이 빈번하여 편찬 책임자의 교체가 잦아 편찬기간이 9년이나 소요되었다.

인쇄가 진행될 무렵 英祖 3(1727) 丁未換局으로 少論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老論側 史官의 기록이 불공정하므로 實錄補闕廳을 설치하여 總裁官 李光佐의 주재로 補闕正誤를 편찬하고 28 3월 인쇄를 완료하여 原編 각 끝 권에 合本하였다.


 

(25) 朝鮮王朝實錄 世界記錄遺産 登載 認證銅板


 

(26) 조선왕조실록 세계기록유산 등재 認證書

朝鮮王朝實錄은 王室 중심의 敍述方式과 名分論的 視角, 黨論에 의한 曲筆의 문제 등이 限界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多方面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史料로 1997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7)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국보 제32-  *원본소장: 陜川 海印寺

大藏經은 經??論의 三藏을 말하며, 佛敎經典의 叢書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高宗 24(1237)35(1248)에 걸쳐 간행되었으며,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高麗大藏經>이라고도 하고, 板數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 4천 煩惱에 해당하는 8 4천 法門을 실었다고 <八萬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顯宗 때 새긴 <初雕大藏經>이 高宗 19(1232) 몽고의 침입으로 燒失되어 다시 大藏經을 만들어 <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하며 몽고군의 침입을 佛敎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大藏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경남 南海에 설치한 分司大藏都監에서 木板에 새겼다. (*: 새길 조)

원래 江華山城 西門 밖 大藏經板庫에 보관되었던 것을 江華 禪源寺를 거쳐 조선

太祖 7(1398) 5월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현재 해인사 法寶殿과 修多羅藏에 보관되어 있으며 日帝時代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大藏經板은 현재 없어진 宋나라 北宋官版大藏經이나 契丹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誤字?脫字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여 그 保存價値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2007 6 <高麗大藏經板 및 諸經板>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8) 한국의 유교책판(儒敎冊版)   *원본소장; 韓國國學振興院

조선시대 儒學者들의 著作物 718종의 書籍을 간행하기 위해 나무 판에 새긴 印刷版으로 모두 64,226장으로 되어 있으며, 305개 門中과 書院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을 기탁 받아 韓國國學振興院 藏板閣에 보존하고 있다.

제작연대는 16세기~20세기 중반까지 다양하고 내용도 문학?정치?경제?철학?대인관계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있으며 모두 人倫共同體의 실현이라는 儒學의 이념에 기초한 유학자들의 저술들이다.

儒敎冊版은 국가가 주도해 제작한 대장경과는 달리 각 지역의 지식인 집단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든 것이다.

冊版은 지역사회 지식인 계층의 여론인 이른바 ‘公論’으로 제작되고 관리되었으며, 先賢이 남긴 학문의 상징으로 여겨져 門中이나 書院의 藏板閣에 보존되어 엄격히 관리되었다.

‘共同體 出版’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책판의 제작과 관리과정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여 20세기 중반까지 5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지역의 知識人 집단은 책판을 媒介로 ‘集團知性’을 형성했으며 유교책판은 그러한 집단지성의 産物이자 그 학문적 성취를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전해주는 소중한 遺産이다.

한국의 유교책판은 2015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9) 戰爭과 廢墟, 그리고 分斷의 아픔

=1950.12.04 平壤 大同江 鐵橋의 破損된 Truss 위로 대동강을 건너는 避難民?. 당시 AP通信 從軍記者 Max Desfor가 찍은 사진으로 1951년 퓰리처賞을 受賞하였다.

 

*나도 이 장면을 직접 보았다. 나는 1950.12.05 새벽 임시로 가설되었던 木橋가 폭파되어  물위에 떠있는 木橋部材 위를 엉금엉금 기어 大同江을 건넜다.

 

1950.10.19 국군 제1사단이 平壤에 入城했으나 中共軍의 介入으로 유엔군 12.03 평양에서 철수하고 國軍도 12.04에 철수하면서 임시가설교량인 木橋를 폭파하였다.

우리가족도 피난하려고 12.03 大同江邊 북쪽 大同門 부근으로 나왔으나 목교는

통행금지이고 나룻배도 없으며 대동강변에는 平北?平南지역에서 온 피난민까지 뒤엉켜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피난민 중에는 大同江 鐵橋의 破損된 Truss 위로 건너고, 일부 청년들은 근처 집에서 나무문짝을 떼어와 물에 띄우고 뗏목으로 이용하여 강을 건넜다.

다음 날 다시 나왔으나 사정은 마찬가지, 그런데 국군 憲兵大領이란 者가 국군이 전진하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Jeep차 위에서 방송하고 있어 이를 곧이 듣고 발길을 돌린 사람들도 있었다.

12.04 야간에 국군이 木橋를 폭파하고 대동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12.05 새벽에 다시 나와보니 목교는 끊어지고 남쪽 모래밭 쪽에는 목교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폭파된 목교가 완전히 절단되지 않고 목재Beam이 물 위에 떠 있어 그 위를 엉금엉금 걷거나 기었는데 유난히 추웠던 1950 12월 목재에 얼음이 덮여 아차!하는 순간 첨벙!소리를 내며 물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14살이었던 나는 다행히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너와 불타는 부분에서는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려 무사히 大同江 남쪽 船橋里에 도착하였다.

길을 따라 대동강 바로 남쪽 역 京義線 大同江驛에 도착해 보니 피난민들은 여전히 부서진 대동강철교 위를 건너고 있었다.

平壤-沙里院-開城-서울에 이르는 國道는 유엔군의 撤收路로 피난민의 進入을 통제하여 京義線 철길을 따라 南下했는데 沙里院에 도착하니 開城방면으로는 역시 통제하여 沙里院-新酒幕-海州로 가는 길을 따라 마냥 걸었으며 해주에서 延白郡 白石浦-喬桐島-江華島-仁川에 1951.01.04 도착하였다.

무사히 大同江을 건너지 못했으면 지금 이 글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30) 국군 제1사단 多富洞戰鬪 作戰命令, 1950

*多富洞戰鬪

洛東江防禦線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大邱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擊滅한 전투로 당시 북한군 24,000명과 한미연합군 10,000명의 死傷者가 발생하였다.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북방 22km에 위치한 多富洞(현재 경북 漆谷郡 架山面 多富里)은 大邱防禦에 가장 중요한 戰術的 要衝地로, 다부동이 敵의 手中에 들어가면 我軍은 10km 남쪽으로 撤收가 불가피하고, 大邱가 敵의 地上火砲의 射程圈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增强된 3개 사단을 투입, 21,500명의 兵力과 T-34전차 약 34대 및 各種火砲 약 670門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學徒兵 500여 명을 포함하여

7,600여 명의 병력과 172門의 화포 등 劣勢한 戰鬪力으로 공산군의 8월 總攻勢沮止하여 大邱를 固守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다부동 일대의 主抵抗線이 적에게 崩壞되었으나 仁川上陸作戰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 반격으로 다부동을 재탈환하였다.


 

(31) 6?25-정전협정-전쟁과 피난민-만남의 江은 흐른다.


 

(32) 休戰協定文. 1953.07.27

*1953.07.27 板門店에서 國際聯合軍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中共人民支援軍 司令員 사이에 맺은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韓國 軍事停戰에 관한 협정>이다.

(大韓民國은 당시 李承晩 대통령이 통일을 주장하며 끝까지 서명하지 않아 除外되었다.)

협정은 英文·한글·漢文으로 작성되었고, 내용은 序言과 前文 5 63,

附錄 11 26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언은 협정의 체결 목적·성격·적용, 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2조는 停火 및 停戰의 구체적 조치, 3조는 전쟁 포로에 관한 조치, 4조는 쌍방관계 정부들에 대한 건의, 5조는 부칙, 부록은 중립국 송환위원회 職權의 범위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33) 6?25전쟁과 피난민. 避難民通路略圖


              

          

                 (34) 離散家族을 찾습니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記錄物

1983.06.30~11.14까지 138일 동안 한국방송공사(KBS)가 生放送으로 放映한

離散家族찾기 운동과 관련된 映像物과 사진 등의 기록물로, 2015.1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83.06.30 20:15~11.14 04:40까지 방송기간 138, 방송시간 453시간 45분동안 KBS가 생방송으로 방영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과 관련된 기록물로 비디오 錄畵 原本테이프 463개와 담당 프로듀서의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직접 작성한 신청서, 日日 방송진행표, 큐시트(cuesheet; 무대감독이나 기술 담당원을 위해 여러 가지 큐를 상세히 정리한 표), 기념음반, 사진 등 2 522건의 기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6?25전쟁과 南北分斷으로 발생된 離散家族 문제는 분단과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비극적 상황으로 여겨 KBS에서는 1983년 휴전협정 30주년을 맞이하여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특별생방송을 기획해 생방송 했다.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기간에 10 952건의 이산가족 신청이 접수되고,

5 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었으며, 1 189명의 이산가족이 相逢하였다.

이 기록물은 韓半島의 비극적인 분단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록일 뿐 아니라, 전쟁의 慘狀을 전세계에 고발하고 인권과 보편적 人類愛를 고취시킨 생생한 기록으로 2015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5) 大韓民國의 어제와 오늘


 

       (36) 1948~1960

1948년 大韓民國 憲法制定-1948.05.10 總選擧 및 大韓民國 민주주의 의 확립-

1960 4?19혁명.


 

    (37) 1980년대


 

(38) 大韓民國 民主主義와 經濟成長


               

          

                    (39)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食糧自給과 山林綠化, 화학?철강?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産業의 高度化,

 7억 달러의 수출달성, 고용확대, 국민소득의 비약적 증대, 과학기술의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에 그 목표를 두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한 소요자금 9,800억 원 중 국내자금이 6,029억 원,

외자가 14 2100만 달러로 이 중 6억 달러가 1965년의 한일국교 정상화로

 들어오게 되었다.

같은 해 1월 베트남 파병에서 1973 3월까지 8년간에 걸친 戰爭特需로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9.6%였으며 輸出主導型체제가 확립되어 1971년에는 10 6,760만 달러를 수출하여 輸出依存度는 13.7%에서 17.8%로 높아졌으며, 공업건설이 본격화됨에 따라 外資依存度가 높아지고, 直接投資가 이루어졌다.

 

*經濟開發 五個年計劃

국민경제발전을 목적으로 5년 단위로 추진되었던 경제계획으로

1차계획(1962~66)-2차계획(1967~71)-3차계획(1972~76)-

4차 계획(1977~81)-5차계획(1982~86)으로 추진되었다.


 

 (40) 輸出規模 推移-1인당 GDP추이


              

                 

                     (41) 1950년대


              

           

                    (42) 1960년대


              

           

                      (43) 1970년대


              

           

                    (44) 1980년대


              

           

                     (45) 1990~2000년대


 

 (46) 세계로 국제정책확대


 

(47) 기록관리관련 국제협력강화


 

(48) 새마을 운동

1970~1979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추진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대통령의 演說文과 決裁文書 등 관련 문서와 사진 및 映像 등 약 2 2,000여 건의 자료들이 2013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기록물은

① 대통령의 親筆原稿와 연설문 및 서명이 담긴 결재문서 등 대통령비서실이 생산한 자료

② 새마을사업 지원, 새마을관련 세금감면, 새마을조직·단체설립 등의 법령과 관련한 행정문서 등 중앙 및 지방행정부처가 생산한 자료

③ 마을운영규정물, 마을회의 및 주민총회 등 각종 회의록을 비롯한 마을단위의

     새마을운동기록물

④ 새마을지도자들의 성공사례를 담은 원고와 편지

⑤ 각계각층의 시민, 단체, 기업 등이 대통령과 정부에 보낸 편지 및 寄贈書

⑥ 새마을교육교재 原稿와 分任討議 차트 등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생산한 기록물 등 2 2000여 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기관에서 생산한 자료들은 國家記錄院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생산한 자료들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보존되어 있다.

새마을운동은 세계 最貧國이었던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는 礎石이 되었으며,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과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UNESCAP) 등에서 貧困退治의 모델로 채택하고 아프리카 등 많은 低開發國家에서 국가발전의 모범사례로 학습하는 '인류사의 소중한 資産'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새마을운동이 빈곤퇴치를 위한 국가발전의 한 모델이자 民官協力의 성공적 사례로서 국제적으로 公認을 받았다는데 意義가 있다.


 

(49) 새마을 운동의 세계화


 

(50) 새마을 세계화 주요 傳授國家.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