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요, 비요!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생존의식
가뭄이 든 해, 농민들은 두레로 둠벙이(웅덩이, 충청도 방언)에 고인 물을 품어 올리고, 조그마한 샘의 물을 퍼 나르는 일에 매달렸다. 다른 작물보다 물이 많이 필요한 벼농사의 경우, 농민들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여러 수단과 도구를 동원해야만 했다. 모내기가 한창인 음력 5월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천이나 보에 저장된 물을 용두레, 두레, 맛두레, 무자위 등으로 퍼내는데 일은 온 동네가 밤낮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오뉴월 땡볕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을 적시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가뭄의 사태가 이쯤 되면 마을 부근에 있는 산 정상이나 하천변에 제단을 마련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껏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큰 한발(旱魃: 심한 가뭄)이 계속되면 나라에서 임금이 제주(祭主)가 되어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아 비가 내리지 않는다’하여 임금이 몸소 식음을 전폐하고 궁궐에서 초가로 거처를 옮겼으며, 죄수를 석방하기도 했다.
민가에서는 명산의 산봉우리나 큰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그 일대를 신역(神域)으로 정하여 부정한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고,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기우제를 지냈다. 제물로는 닭, 돼지머리, 술, 과실, 떡, 포 등을 올리는데, 어떤 지방은 무당굿까지 곁들인다. 민간에서는 피를 뿌려 더럽혀 놓으면 그 더러움을 씻기 위해 비를 내린다고 하여,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에 흘려 놓는 일도 있었다.
또한, 농가에서 곡물을 담아 까불러서 불순물을 제거하던 키에는 부정한 것이 붙어 있다고 생각해, 키를 냇가나 강물에 씻으면 용신(龍神)이나 수신(水神)이 노하여 비를 내린다고도 믿었다. 이것은 부인들이 행하는데, 냇가에 나가 키로 물을 떠올려 뿌리며 “비요! 비요!”를 외친다. 그래도 가뭄이 계속되면 집마다 병에 물을 넣고 버드나무 가지로 입구를 막아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가지와 잎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렇게 물이 떨어지듯 비가 오도록 비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보다 무서운 배고픔을 이겨내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을 떨쳐내기 위한 행동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댐이 건설되고 수리시설과 양수시설이 완비된 오늘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으로 걱정과 고생을 하는데 하물며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그 옛날이야 말하지 않아도 가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 가뭄에 단비가 내리면 우산도 쓰지 못하게 하고 비를 그대로 맞았다.
그쳐라! 왕의 음덕과 기후의 조화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기우제와 반대로 비를 그치게 하는 기청제(祈晴祭)가 있다. “삼 년 가뭄에는 먹을거리가 있어도 삼일 홍수에는 먹을거리가 없다”는 말처럼 가뭄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긴 장마와 홍수다. 이렇게 무서운 긴 장맛비와 폭우를 그치게 하기 위해 기청제를 지냈다. 장맛비와 폭우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사대문과 지방의 성문에서 기청제를 거행했다.
또한, 국장(國葬) 등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경우도 비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종묘와 사직에서 날씨가 맑기를 빌기도 했으며, 홍수와 수재를 당했을 때도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기청제를 지냈다. 소풍이나 운동회를 앞두고 비가 내리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는 초등학생의 마음이 바로 기청제인 셈이다.
기청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처음 나타나며,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한성부에서는 사대문에서, 지방에서는 성문에서 기청제를 지냈다’고 나온다. 처음에는 성문 안에서 기청제를 지냈으나, 동문(흥인지문)이 물에 침수된 이후로는 문루(門樓: 궁문, 성문 등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에서 거행했다.
비를 조절하는 동서남북 각 방위의 산천신(山川神)에게 지내는 기청제는 사흘 동안 진행되는데,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에 걸쳐 다시 행하고, 최종적으로는 왕이 직접 종묘나 사직에 나가 제를 지냈다.
기청제는 성문(城門)에서 주로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왕래하는 성문은 외부의 적을 막는 곳이다. 바로 그 성문에서 재앙인 장마와 홍수, 수재를 막는 기청제를 행한 것이다. 기우제는 5·6월에 지내지만 기청제는 8월 입추 이후에 많이 거행했다. 이는 비가 농사일에 중요하고 밀접해 너무 일찍 비를 그치게 하면 오히려 가뭄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추 이후 가을에는 비가 적게 내리더라도 농사에 걱정이 덜하다.
기청제가 입추 이후로 늦어지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먼저 지방에서 수령들이 기청제를 지내는데,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왕이 직접 나섰다. 왕까지 나서서 기청제를 지냈는데 비가 바로 그치지 않으면 이 또한 낭패이다. 아무리 긴 장마라도 가을의 문턱인 입추가 되면 비가 적게 오기 마련이다. 왕의 음덕과 기후의 조화로 기청제 이후에는 반드시 비가 그쳤을 것이다.
옛 편지의 서두에 보면 “일기 고르지 못한 요즘…”으로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날씨는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 고르지 못한 날씨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을 함부로 다룬 인간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어릴 적 소풍 전날의 바람처럼 항상 일기가 고르기를 기원해 본다.
글+사진‧천진기(국립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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