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봄을, 농사꾼 백남기에게
한도숙 시 <시월. 잔인하다> <봄, 꽃>
@민중의 소리
올 겨울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출퇴근길 잠깐 바람 맞기에는 별로 무섭지 않다 해도, 종일 찬바람 맞으며 길을 걷는 것은 어지간한 마음으로는 못할 짓이다.
그런데 이 계절, 멀리 전남 보성에서 길을 나선 사람들이 서울까지 걸어가고 있다.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도보순례단. 2월 11일 출발한 그들은 2월 27일 ‘민중총궐기’ 날에 맞춰 서울에 도착할 계획이다. 고창, 정읍, 김제, 전주, 익산, 논산을 거쳐 2월 20일 대전에 도착한 그들의 수는 200여 명이었다.
출발지가 전남 보성이 된 것은 그곳이 농민 백남기 씨의 고향이기 때문.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2월 21일은 그가 쓰러진 지 딱 100일째 되는 날이다.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그는 경찰의 물대포에 직격당해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100일이 지난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정부나 경찰 차원의 사과는 없었다.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불법시위 중에 일어난 지엽적인 사고’라느니, ‘미국 경찰은 (범죄자를) 죽여도 당당한 공무로 본다’느니, 막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백남기 씨를 비롯한 농민들이 그날 민중총궐기에서 외친 구호는 “밥쌀용 쌀 수입 중단”이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밥쌀용 쌀 3만 톤을 수입했다. 그리고 백남기 씨가 쓰러진 지 한 달 남짓 지난 12월에도 3만 톤을 추가 수입했다. 정부는 “미국 등 무역 상대국과의 마찰과 현재 관세율에 대한 이의제기가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며, “수입쌀의 시장 방출을 최대한 자제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성난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쌀 값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80킬로그램 기준 17만 원이던 쌀 값을 21만 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쌀 값은 14만 원 선으로 오히려 떨어진 상태. 오히려 정부는 ‘공약을 지키라’는 언론 기고문에 대해 반박자료를 내고 “18대 대통령 선거 농업관련 공약에 쌀값 21만원을 약속하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발뺌하기도 했다. ‘지으면 지을수록 적자’인 농사. 농민의 가슴은 정부의 뻔뻔한 거짓말에 다시 멍든다.
시월. 잔인하다
들판이 노랗게 넓고 고되다
온몸 근육통을 참기가 어렵다
관절 마다마다 습격하는 아픔을
파스 쪼가리로 방어하는
가을. 하늘. 짙푸르게 높고 넓다
눈물이 나려 한다
한 줄 바람이 간섭한다
결국 눈물을 훔쳐야 한다
잔인하다 시월,
거친 벼 한 가마니 5만 원
사람답게 살기는 글러 버렸다
굳은 손바닥에 올려진
사람구실 무게
지폐 무게
낟알 무게
그게 담보되지 못하는 세상
결국 눈물을 훔쳐야 한다
가을. 하늘. 시월. 잔인하다
농민시인 한도숙의 시집 <딛고 선 땅>(민중의소리, 2016) 76~77쪽에서 찾은 시다. 한도숙 시인은 전국농민회총연명 의장을 지낸 농민운동가이기도 하고, <한국농정신문> 대표를 지낸 언론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의장님’이었던 때나 ‘대표님’이었던 때나, 그는 언제나 ‘농사꾼’이었다.
이 한 편의 시에 농사꾼 한도숙의 절망과 농사꾼 백남기의 노여움이 담겨 있다. 월급쟁이로 치면 월급날이라고 할 수 있는 10월 수확철. 1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농사꾼의 보람과 기쁨은 이 시에서 읽을 수 없다. “관절 마다마다 습격하는 아픔을/ 파스 쪼가리로 방어”하며 일하지만, 한 줄 바람에도 눈물을 훔쳐야 할 정도로 잔인한 현실. “굳은 손바닥에 올려진/ 사람구실 무게/ 지폐 무게/ 낟알 무게”를 가만히 견줘보면 결국, 농사꾼이 “사람답게 살기는 글러” 버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고된 노동을 달래줄 달콤함은 “한 가마니 5만 원”이라는 현실 앞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토록 잔인하게 견뎌낸 가을. 살길을 열어달라고 서울로 모인 농민들의 외침에 이 나라 정부는 물대포로 대답했다. 밥쌀용 쌀 추가 수입으로 대답했다. 농민들은 불법집회를 일삼는 ‘소요세력’이 됐고, 백남기 씨가 쓰러진 지 두 달 뒤인 올해 1월에는 한 농민이 구속되기도 했다. 경찰은 그가 8개월 전에 참석한 쌀 수입 반대 집회를 문제 삼았다. 그때 경찰관을 폭행했다는 혐의을 내걸고, 10년 만에 집회를 이유로 농민을 구속시켰다.
@박완주 국회의원실
봄, 꽃
봄, 꽃이 피는 건
봄 햇살 때문만은 아니다
꽃이 피는 건
추운 겨울 바람에 몸을 숨겨 온
서리꽃 이고 시린 몸뚱이
참았던 인내의 한계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건
핏기를 돌리던 응어리 풀어내듯
하늘로 솟고 싶은 가지들의 욕망을
꽃으로 펼쳐 놓은
나무들의 자정이다
꽃이 피는 건
돌아온 길이 멀어질수록 화사하고
꽃이 피는 건
어둠 속에도 손에 못이 박히도록
펌프를 자아내는
무던함이 있기 때문이다
봄, 꽃이 피는 건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슴들이 사무치면
그때 활짝 피는 것이다
잔인한 가을이 갔다. 백남기 씨가 쓰러진 가을이 갔다. 노여움과 기다림과 간절함으로 흘러간 100일과 함께 이 겨울도 끝을 보이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겨울을 견디면 봄이 오고, 추위를 견디면 온기를 품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봄을 노래한다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한도숙의 시집 28~29쪽에서 찾은 이 시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상기시켜준다.
봄꽃은 “돌아온 길이 멀어질수록 화사”하다고 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슴들이 사무치면” 그때야 피어나는 것이 봄꽃이라고 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멍하니 손을 놓고 그저 달력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다. 봄을 향한 간절한 실천이 봄을 불러오는 것이다.
함부로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참 무책임한 시절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도 손에 못이 박히도록/ 펌프를 자아내는/ 무던함”으로 오늘 하루도 머나먼 서울길 ‘도보순례’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화사한 봄꽃을 노래할 자격이 있다. “국가폭력 책임자 처벌! 민주주의 회복! 백남기 농민 살려내라!” 천리를 간다는 황소걸음으로 뚜벅뚜벅 이어지는 그들의 걸음이 언젠가 서울에 가닿듯, 화사한 봄꽃을 피우려는 그들의 실천도 언젠가 이 겨울의 끝에 닿을 것이다.
꼭 30년 전인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UR)가 시작됐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만은 막겠다’던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년도 채 지나기 전인 1993년 쌀 개방을 선언했고, 차츰차츰 늘어난 쌀 수입량은 2015년 연간 40만 톤에 이르게 됐다. 30년 전 쌀 수입 반대 투쟁에 나선 농민들은 이제 60대가 됐다. 청년 시절의 한때와 장년, 중년의 시절을 ‘아스팔트 농사’를 짓는 데 다 보내고 그들은 이제 잔인한 노년을 맞았다. 예순아홉의 나이에 서울 아스팔트 위에서 정신을 잃은 보성 농민 백남기 씨 역시 그중 하나다.
30년 먼 세월을 돌아온 농민들이 피울 봄꽃은 분명 그 어느 꽃보다 화사할 것이다. ‘농사꾼’ 백남기 씨에게도 또 한 번의 봄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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