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철책선이 쳐지고 약 900평방킬로미터의 땅은 접근할 수 없는, 사라진 땅이 되었다. DMZ에 민간인통제구역까지 더해진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은‘자연’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생태계가 복원돼 원시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 철새들의 안식처
여름철의 토교저수지는 그저 거대한 물웅덩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겨울이 되면 이곳의 진짜 주인이 나타난다. 특히 동이틀 무렵이면 잠을 자던 두루미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장관을 연출한다. 독수리와 청둥오리, 기러기 등의 새들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철원에 이처럼 철새가 많이 찾는 이유는 일 년 내내 일정 온도의 물이 뿜어져나오는 샘통을 중심으로 얼지 않고 마르지도 않는 자연 연못이 많은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천적인 ‘인간’이 통제되어 원래 주인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철원의 동물들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 월정리역에 있는 철원 두루미관으로 향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박제된 두루미와 고라니, 독수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두루미의 크기에 놀라고, 희고 고운 자태에 감동하게 된다. 이처럼 멸종 위기에 처해 쉽게 볼 수 없는 동물들을 실제 크기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보호를 소홀히 하다 보면 이런 동물들을 전시관이나 사진첩 속에서만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비경
철원은 남한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현무암 지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와 달리 이곳의 현무암은 철분을 많이 함유하여 색이 붉고 무게도 훨씬 무거운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한탄강변에서는 수직으로 깎여 단면이 드러난 주상절리의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송대소 주변에는 이러한 주상절리를 더욱 가깝게 볼 수 있도록 산책로와 자전거 코스를 조성해놓았다. 승일교에서 출발해, 고석정을 거쳐 송대소, 직탕폭포로 이어지는 한여울길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세월이 멈춘 듯한 오지 마을
비수구미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꽤나 험난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타고 들어가야 작은 마을이 나온다. 단 네 가구만이 사는 오지 중의 오지 마을인 이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오면서부터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찾아 어려운 발걸음을 하기 시작했고 작은 민박집도 북적이게 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 이곳에 오는 이유는 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고즈넉함 때문이다.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과 자연이 만들어낸 천혜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수고로움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 열목어가 사는 천연의 계곡과 숲
DMZ에서는 차갑고 가장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열목어도 볼 수 있다. 열목어 최대 서식지로 손꼽히는 두타연으로 가는길, 출입통제소에서 나눠주는 위치추적기를 목에 거니 이곳이 민간인통제구역이자 잠시 멈춘 전쟁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노라니 “지뢰 미확인 지역이기 때문에 정해진 길로만 다니고 물에도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설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통제된 덕분에 열목어는 강물을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얼마나 해를 끼쳐왔는지 새삼 미안해진다.
안내소를 지나 우거진 숲 사이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두타연은 자연 그대로인 계곡 사이로 투명하게 흐르는 물이 신비로울 지경이다. 두타연은 굽이치던 물길에 의해 한 부분이 절단되면서 작은 폭포가 되고 그 아래 물웅덩이가 만들어진 지형으로, 그 일대에는 생태 탐방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양구 전투위령비와 조각공원을 지나 징검다리도 건너고, 출렁다리도 건너보면 천혜의 자연 한가운데 있음을 만끽할 수 있다.
- 자연이 만든 신기한 땅
‘펀치볼마을’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찾아나선다. 역시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야 하지만 산 중턱에 시원하게 뚫린 터널이 마을로 가는 길을 훨씬 단축시켜준다. 마을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터널의 맞은편 을지전망대에 오르는 것이 좋다.
을지전망대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해안’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에 왜 펀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 모습이 마치 오목한 화채그릇 같다고 해서 ‘펀치볼(Punch bowl)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소개한 데서 유래되었는데,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곳 펀치볼 마을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출입증을 받은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오지에 속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고, 독특한 마을의 모습을 보러 찾아오는 여행객들도 꽤 많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도 마련돼 있어 여유롭게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도 있다.
- 남북의 거물들이 선택한 호수
화진포에는 유명한 세 개의 별장이 있다. 북의 김일성과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의 별장이다.
그만큼 아름답고 자연을 벗해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는 뜻일것이다. 화진포는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자연 호수들 중에서 가장 큰데, 갈대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어 철새들이 찾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백조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고니가 호수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호수의 물결과 함께 마음도 평온해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할수록 자연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동물들도 활기차게 살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DMZ에서 새삼 깨닫는다.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동시에,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해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비극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덕분에 지킬 수 있었던 자연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숙제가 남는 여행길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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