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 정원은 그 경계를 따지지 않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 내 땅’이라는 농담이 말해주듯, 우리의 정원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기거하고 있는 공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담장 너머, 창문 사이, 대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풍경 모두를 넉넉하게 끌어안은 우리나라 전통 조경의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나선다.
- 신선의 세계로 들어서는 길
청평사는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건너가면서부터 시작된다. 물을 건너고 30분 남짓한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청평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청평사를 찾는 사람들은 소양호를 건너는 배에 오르면서부터 거대한 청평사의 정원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진 청평사는 그 주변이 하나의 큰 정원이다. 약 3만 평방미터의 면적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도록 수로를 내고 연못을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완성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이곳 청평사의 전설로 전해지는 상사뱀에 이어 거북을 닮은 바위도 만나고, 폭포와 연이어 널려 있는 너럭바위가 만들어내는 특색 있는 풍경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비로소 청평사 정원의 백미라 불리는 고려영지에 닿는데, 계곡물을 내어 인공적으로 만든 이 연못은 오봉산의 부용봉이 비치도록 만들어졌다. 맑은 날이면 부용봉 위에 있는 암자에서 스님이 염불 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청평사의 회전문에 이른다. 중생이 끊임없이 생을 반복하는 윤회사상을 말해주고 있는 이 문은 사찰의 출입문 구실을 한다. 여느 사찰과 달리 사천왕상이 없고 윗부분에 홍살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대신 사천왕상 입상이나 그림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청평사의 많은 건물이 대부분 없어졌는데, 유일하게 회전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당시의 건축 문화를 생생하게 재현해주고 있다. 회전문 너머 청평사는 오랜 복원 작업 끝에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들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한다.
청평사는 예부터 속세와 단절된 심신 수양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973년(고려 광종 24년)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이후, 1089년(고려 선종 6년)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은거하는 등 선을 닦는 도량으로 사용됐다. 맑고 깨끗한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진 청평사는 오늘날에도 많은이들에게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선물한다. 청평사 경내에 서서 포근하게 안아주는 주변의 산과 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신선의 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 소양강 따라 흐르는 시와 노래
춘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소양강은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물줄기에 몇 개의 댐이 생기고 물길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변함없는 절경이 강을 따라 흐른다. 그중 소양강의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소양정이다. 봉의산 중턱에서 소양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찾아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전해진다. 처음 지을 때는 강 쪽으로 더 가까이 있었으나, 잦은 홍수 피해로 인해 지금 위치인 산 중턱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 덕에 전망은 더 넓어졌다.
2층에 올라서면 의암호가 한눈에 들어오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화악산 줄기가 펼쳐진다. 처음 지어질 당시 너른들판이 있었을 강 건너편엔 아파트촌이 빼곡히 들어섰다. 아쉽기는 하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른 우리 사는 모습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 맑은 몸과 마음을 찾아가는 길
주차장에서 내려 수타사로 가는 길,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과 그 위로 가로놓인 공작교가 눈에 들어온다. 유속이 느리고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 여느 계곡처럼 맑아 보이지는 않아도 나름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에 생태 학습장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계곡을 따라 나무 그늘 아래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비로소 수타사에 닿는다. 수타사를 찾은 사람들이 사찰로 들어서기 전 먼저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바로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다. 초여름 연꽃이 절정에 달할때면 탐스러운 연꽃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이 사찰은 산자락에 포근하게 안겨 1,000여 년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봉황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면 누각인 홍회루가 주변 풍광을 감싸 안는다. 경내의 꽃나무와 잘 가꾸어진 화단은 담 안의 정원에도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산속의 쉼터이자 공원 같은 곳, 이곳이 바로 수타사의 진짜 모습이다.
- 너른 마음으로 강릉을 품다
조선시대 강릉은 이름난 사대부 명문가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사대부 가옥이 바로 선교장이다. 원래 전주 사람이었던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정자 등 민가의 거의 모든 형식을 갖춘 넓은 집이다.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공간은 소박하게 꾸며, 전체적으로 자유롭고 넉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각 건물들을 처음부터 계획하여 건축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하나씩 증축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각 건물의 통일성은 부족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장점이 되어 변화무쌍하고 활기찬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는 다른 사대부들의 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풍족한 곳간과 넉넉한 인심으로 손님을 맞이했던 선교장이 지금은 옛날 강릉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옛 명문가의 저택을 거닐며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생각해본다.
- 사대부들의 풍류 가득한 생활
선교장을 나서 경포호 쪽으로 가다 보면 해운정이라는 오래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학자인 송시열의 글씨가 현판으로 걸려 있고, 건물 안에도 율곡 이이와 권진응 등 유명한 문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고 글을 지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이 건물은 3단으로 높게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지어 경포호를 내다보고 있는데, 건물의 앞면 창은 모두 활짝 열 수 있게 했고, 툇마루를 두어 자연 풍광을 그대로 즐길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전통 조경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의 전통문화가 녹아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공존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해운정 툇마루에 앉아 경포호와 그 너머의 동해를 바라보며 자연과 공존하고 더 넓은 세상을 품에 담을 수 있기를 꿈꿔본다.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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