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덟 번째 이야기 길 - 끝나지 않은 전쟁, 소리없는 총성 - 한국전쟁의 참상과 민족의 비극

이산저산구름 2015. 4. 14. 09:17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긴다. 쏟아지는 포탄과 끊임없는 총성 속에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총칼을 겨눈 사람들은 큰 트라우마를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포탄과 총성은 잠시 끊겼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 사라진 옛 도시의 흔적을 찾아

 

 

경원선을 달리는 기차는 백마고지역에서 멈추어 섰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람도 마찬가지. 분단을 상징하는‘가로막힌 땅’ 철원에는 발이 묶여 돌아서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군사분계선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발걸음뿐만이 아니다. 전쟁을 겪으며 무너진 현장은‘민통선’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전쟁 당시의 과거에 고스란히 묶여 있다.
지금은 철원이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과 북을 잇는 철도가 지나는 대규모 도시였다. 철원 근대문화유산 건물터를 둘러보면 그 당시 철원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날 은행에 해당하는 ‘구 철원 제2금융조합 건물터(등록문화재 제137호)’, ‘철원 농산물검사소(등록문화재 제25호)’, ‘철원 얼음창고(등록문화재 제24호)’를 비롯해 신도 수가 500여 명에 달했던 ‘철원 감리교회(등록문화재 제23호)’ 등의 흔적은 이 지역이 경제·문화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이후 철원은 38선 이북인 북한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 지은 ‘철원 노동당사(등록문화재 제22호)’도 아직 남아 있다. 치열했던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근의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거의 흔적만 남은 것에 비해, 이 건물은 비교적 양호하게 골조와 외벽이 남아 있다. 당시 공산당이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여 견고하게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갖 수탈과 핍박이 이어져 “이곳에 들어가면 성한 몸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과거엔 돈과 사람이 모이는 중심가였지만 지금은 인솔자를 따라 줄지어 다니는 관광객이 지나가고 나면 가끔 농부나 군인들의 트럭 외엔 지나는 발길이 거의 없다. 전쟁이 바꾸어놓은 이 같은 풍경은 휴전선이 걷히고 나면 다시 옛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

 


- 남과 북이 하나로 연결되는 다리

 

  

철원에는 다리의 반절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승일교가 있다. 승일교는 1948년 철원에 주둔해 있던 공산군이 인근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놓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 주민들은 농사나 공장 일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다리 건설 현장으로 와서 정해진 양의 돌을 날라야 했는데, 매일 밤늦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공사가 중단됐고, 이곳은 남측 영토가 되었다. 끊겼던 다리는 1958년 나머지 절반의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드디어 이어지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북측 절반은 옛 소련식으로, 남측 절반은 미국식으로 지어져 각기 다른 교각 아치를 볼 수 있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든 이 다리처럼 언젠가는 모든 길이 다시 연결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꿈꾸며 승일교를 건넌다.


 

-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바보댐

 

30대 후반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화의 댐’을 기억할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 북에서 금강산댐을 만들어 많은 양의 물을 한 번에 흘려보내면 서울이 물바다가된다는 이야기에서 댐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후 이 모든 것이 사기에 가까운 과장과 왜곡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 논란의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평화의 댐은 2005년 보강 공사 이후 약 26억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육지의 바다라 불리는 소양강댐의 29억 톤에 육박하는 양이다.
그러나 이 댐은 소양강댐이 만든 ‘바다 같은 호수’의 그림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댐으로, 평소에는 물을 저장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건류댐이기 때문이다. 홍수 조절이나 전력 생산 등 댐의 원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댐’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강원 북부 지역의 집중호우와 2002년, 2005년 북의 예고 없는 금강산댐 방류 시에 제법 그 기능을 톡톡히 해 재평가되기도 했다.
댐 전망대 옆에는 커다란 종이 걸려 있는데, 세계 각 지역의 전쟁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를 모아 만든 것이다. 방문객은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의 통일을 기원하며 종을 울릴 수 있는데, 공원을 넘어 울려퍼지는 웅장한 종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아픈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북한 땅

 

양구 을지전망대는 군사분계선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가파른 경사를 굽이굽이 올라가면 해발 1,000미터의 높이에서 주변을 살필 수 있다. 발 밑으로는 남측한계선이 지나고 바로 코앞으로 군사분계선이, 그 바로 너머엔 북한 군인들의 초소가 있다. 발을 뻗어 내디디면 바로 닿을 것 같이 가까운 곳에 북한 땅, 북한 사람이 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남과 북이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탓에 을지전망대에서는 유난히 심리전이 강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남측 초소에서 마주 보이는 북한 쪽 산 계곡에 폭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 군인들의 심리를 혼란케 하기 위해 여자들이 목욕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에 질세라 맞은편 가칠봉 정상에 수영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금 들으면 웃음이 나는 해프닝이지만 아직까지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휴전선 부근에서는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금강산 가는 길, 고성 통일전망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금강산 관광이 이뤄지던 당시, 고성 통일전망대 근처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사용하던 출입국사무소 등을 지나다 보니 지금은 더 이상 왕래할 수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통일전망대에 오르자 넓게 펼쳐진 동해와 해변을 따라 북으로 이어지는 해금강의 절경이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날이면 금강산의 일부 봉우리를 볼 수 있어 직접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것으로나마 달래보려고 하는 실향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언제쯤이면 저곳에 자유롭게 가볼 수 있을까? 지구상 어느 곳이든, 심지어는 달나라 우주여행도 가는 지금,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땅 북한을 눈앞에 두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 손잡고 함께 가자

 

고성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속초 아바이마을에 닿는다. 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서 정착한 마을로,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60년이 넘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살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로막힌 휴전선은 열릴 줄 모르고 세월은 또다시 흘러간다.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지어진 마을이라 짧은 거리지만 갯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TV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관광객 수가 부쩍 늘었다. 아바이순대라고 불리는 오징어순대와 함흥냉면 같은 이북의 맛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아바이마을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면 속초수복기념탑을 볼 수있다. 전쟁과 관련된 탑인 만큼 으레 군인들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상상하기 쉬운데, 주인공부터 의외다. 높게 솟은 탑 위에는 두 손을 꼭 잡고 북을 향해 손짓하며 걸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있는데, 분단의 아픔, 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