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세 번째 이야기 길 - 궁예와 공양왕 - 고려의 시작과 끝

이산저산구름 2015. 3. 10. 08:21

 

 

역사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땅 위에는 많은 나라와 세력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역사를 이어간다. 강원도는 1,100여 년 전 궁예가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대동방국 건설의 야망을 품고 처음 도읍을 세웠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건을 만났고 고려가 탄생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왕이 유배되고 피살당한 곳 역시 강원도였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영웅의 탄생을 지켜봤고, 사라져가는 왕조를 마지막으로 품은 땅. 강원도에서 고려의 시작과 끝을 되짚어본다.

 

 

- 궁예가 꿈꾸었던 새 나라

 

철원 평화전망대에 오르면 태봉국 궁예도성터라는 모형도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전쟁 이야기만 가득할 줄 알았던 이곳에서 만난 뜻밖의 이야기. 철원은 궁예가 후삼국 중 하나인 후 고구려를 세우는 과정에서 국호를 태봉이라 하고 도읍을 정한 곳이다.
도성터는 휴전선이 놓인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출입할 수 없지만 평화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도성의 자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북을 뒤로 하고 비옥한 철원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원선 철도 건설로 도성의 성벽이 파괴되고, 분단으로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발굴이나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1942년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도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성의 구조로 내성은 둘레 7.7킬로미터, 외성은 둘레 12.7킬로미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나라의 꿈은 현실이 되는 듯 했으나, 궁예는 정권을 쥐자 평정심을 잃고 횡포를 저질러 민심을 잃게 되었다. 결국 왕좌는 왕건에게 넘겨주게 되고 궁예는 피살당하고 말았다.

 


- 고려의 마지막 왕을 섬긴 마을

 

 

궁예가 자신의 꿈대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왕건은 그의 나라를 이어받아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해 다시 하나된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고려도 5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공교롭게도 고려의 시작이었던 태봉국 도성터에서 멀지 않은 고성 왕곡마을에 남아 있다.
고성 왕곡마을에는 고려 말 공양왕의 최측근이었던 함부열이 끝까지 공양왕을 모시며 충성을 다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양왕이 왕좌를 내어주고 이곳 고성까지 쫓겨 오자 함부열은 왕을 따라 고성에 정착하게 되었다. 예부터 왕곡마을은 물에 떠 있는 배의 형태인 행주형 지형인데, 이는 풍수지리상 사람과 재물이 모이는 명당이라 여기는 곳이다.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들어온 곳에 위치해 눈에 잘 띄지 않는데다가, 야산에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된‘골’형태의 분지를 이루고 있으니 사라진 나라의 충신들이 몸을 숨기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충신 함부열의 후손이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니 고려의 마지막에서 시작된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 가옥 그대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마을의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도 차분해진다. 나라와 왕을 위해 끝까지 충절을 지킨 함부열의 나지막한 가르침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듯, 시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을의 오래된 기운이 느껴진다.

 


- 기암괴석 절벽 위에서 꿈꾼 새로운 세상

 

고려가 멸망하고 새롭게 선 조선의 시작도 이곳 강원도 바닷가에서 찾을 수 있다.
고성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하조대는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뤄진 암석 해안인데, 솔숲과 어우러진 절경이 일품이다. 이곳에서 고려 말의 인물인 하륜과 조준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자칫 발을 헛디디면 시퍼런 동해로 떨어질 수도 있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서서 낡은 왕조를 대신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고 상상하니 그 비장함이 발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하륜과 조준은 고려 말 나라 안이 어지럽고 왕실이 지도력을 상실하자 새로운 왕조 건립에 뜻을 두고 벼슬을 버리고 이곳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운 왕조를 도모해 다시 한양으로 향했고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훗날 이세근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하조대라 이름 짓고 바위에 세 글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 새로운 왕을 낳은 명당 중의 명당

 

 

삼척엔 이름난 명당이 있는데, 바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의 부모 묘이다.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 장군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는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의 주 능선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어 웅장한 땅의 기운이 돋보인다.
목조가 이곳에 묘를 조성한 것과 관련해 전설이 전해진다. 묏자리를 찾던 중 마주친 한 스님이‘이곳에 묘를 쓰면 새로운 왕조를 여는 왕이 날 것이다’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목조가 그 자리에 부모를 묻은 것이다. 여느 왕릉보다도 좋은 명당에, 잘 가꾸어놓은 것은 새로운 왕조에 권위를 실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것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태조를 신격화한 이야기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미 일어난 일을 승자의 시선으로 전하게 마련인 만큼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 고려 마지막 왕 그는 어디에 있나

 

 

고려의 서른네 번째이자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무능한 왕이라는 평가와 착하고 여린 성품이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왕족이기는 하나 왕위 계승 서열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이성계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앉게 되었으니, 왕으로서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칠 기회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시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든 권력을 향한 욕망에 의한 것이었든 조선은 건국되었고 고려는 멸망했다. 이성계가 그 과정에서 징검다리로 삼았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유배 생활을 거듭하다 결국 삼척에서 피살당해 최후를 맞이했다.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공양왕과 두 아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전해진다. 왕릉에는 네 개의 봉분이 있는데, 하나는 공양왕의 것이고 두 개는 아들의 것, 마지막 하나는 시녀 또는 말의 무덤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공양왕릉이라는 이름의 왕릉이 경기도 고양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공식 인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논란이 되고 있으나, 태종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던 공양왕을 1416년(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존하고 고양현(지금의 고양시)에 무덤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고양의 공양왕릉이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곳 삼척의 공양왕릉도 1662년(조선 현종 3년) 삼척부사 허목의 『척주지』에 기록되어 있어 이 또한 정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삼척의 공양왕릉이 원래 묻힌 곳이고, 후에 태종이 공양왕을 추존하면서 능을 서울 인근으로 옮겨와 새로 조성한 것이 고양의 공양왕릉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죽은 뒤에도 정식으로 묘 하나 남기지 못해 이런 논란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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