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사
청원 안심사
비로전충북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충북유형문화재 제112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775년(혜공왕 11)에 진표(眞表)가 절을 지은 뒤 수십 명의 제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안심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1325년(충숙왕
12)에 원명국사(元明國師)가 중창하고, 조선시대에는 1613년(광해군 5)에 비로전을 중건했으며 1626년(인조 4)에 송암(松庵)이
중수했다.
1672년(현종 13)
대웅전을 중수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시 폐사되기도 했으나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법통을 이어왔다. 1980년과 1989년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1984년에 요사를 새로 지었다.
(두산백과)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산신각·충혼각·요사채 2동이 있다. 대웅전(보물 664) 안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상(塑組像) 형식의 삼신불상과 후불탱화·신중탱화
및 근래에 제작된 동종이 있다. 후불탱화는 1891년(고종 28)에 한봉 창엽이 그렸고, 신중탱화는 1998년에 새롭게 봉안한 것이다.
영산전(충북유형문화재
112)은 1613년에 창건하였다가 풍상으로 퇴락해가는 것을 1842년(현종 8)에 중수하였다. 본디 이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비로전이었으나 나한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영산전이 되었다. 안에는 석가삼존불, 16나한상, 영산후불탱화, 신중탱화, 나한도 4점, 법고,
괘불함 등이 있다.
(두산백과)
고즈넉한 저녁시간의 산사 답사도 좋지만 이른아침의 산사도 정말 좋다.
국보 297호
영산전 불단 앞에 마련된
괘불함에는 1652년(효종 3)에 제작한 괘불(국보 297)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괘불은 석가여래상을 주존으로 주위에 불보살과 제자·성중 및
사천왕의 호법신들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크기는 가로 462cm,
세로 627cm이며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본존상의 높이는 372cm에 이른다.
(두산백과)
다른곳의 괘불탱은 구경도 할수 없었는데 복제본이라도 이렇게라도 보여주니 감사할뿐이다.
충혼각은 6·25전쟁 때
죽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인근 부대에서 세웠으며 매년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낸다. 이밖에 세존사리탑(충북유형문화재 27)과 세존사리비, 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 목판 다라니경, 석탑 부재 등이 있다.
세존사리탑은 진표가 창건
당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조선 말에 탑의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1881년(고종 18)에 구천동으로
옮긴 뒤 1900년(광무 4)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두산백과)
청주고인쇄박물관
이곳에계신 해설사님의 자세한 설명에 직지에 대해 공부하고
1377년 (고려우왕3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책으로 현재 전하고 있는 금속활자중 가장 오래된책이다.
청주흥덕사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의
거점, 흥덕사지 *
양변산 동남쪽 기슭의 옛
연당리 마을에 있는 흥덕사지는 1985년에 한국토지공사에서 시행하던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된 고사지이다.
사찰의 창건
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의 간기에 고려 우왕 3년 (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明記)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두산백과)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금구와 청동불발에 "서원부 흥덕사"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흥덕사지임을 입증하게 된
것이다.
발굴 결과 남북 일직선
상에 중문과 탑, 금강, 강당이 배치되고 주위에 회랑이 돌아간 신라의 전통양식인 단탑가랍식(單塔伽藍式)으로 밝혀졌으며, "대중삼년(大中三年)"
명와(銘瓦)가 출토되어, 신라 문성왕 11년(849년)에 이미 이곳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발굴 완료 후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어 1987년부터 1991년까지 5개년에 걸쳐 43억원을 투입하여 40,992㎡(12,400평)의 부지 위에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달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고인쇄박물관과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금당(金堂)과 3층 석탑(三層石塔)을 복원하고,
1992년 3월 17일에 개관하였다.
(한국관광공사)
* 불조직지심체요절에 대하여 *
흥덕사지에서 인쇄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44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세계심판》보다도 63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유일하게 프랑스
파리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두산백과)
금속활자 그 위대한 발명
세계여러나라 석학들은 금속활자 발명을 정보화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시간이며 인류문화발달에 가장큰공헌을
한것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 프랑스파리에 보관되어있는것을 5년 임대해서 우리나라에 있다니....
안타깝기 짝이없다.
사적 제315호. 1986년
지정. 지정면적 9만 2588m2. 이 지역에서는 1985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서원부 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 새겨진 금구(禁口)
조각과 “…황통 10년(皇統十年)… 흥덕사(興德寺)…”라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 뚜껑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 곳이
1377년(고려 우왕 3) 금속활자를 직접 주조하여 경한(景閑)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인쇄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유적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인쇄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44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세계심판》보다도 63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유일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두산백과)
흥덕사라는 사찰터는 그 동안
문헌상으로만 ‘청주목외(淸州牧外:청주 교외) 흥덕사’라고만 전하여,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이 유적의 전체적인 윤곽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확인된 유구로는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탑지(塔址) 및 서회랑지(西廻廊址) 일부가 드러났고, 토제품인 기와
·전(塡) ·치미편(鴟尾片) ·방추차(紡錘車) ·민무늬토기편[無文土器片] 등과 청동제품인 금구(禁口) ·소종(小鐘) ·금강저(金剛杵)
·향로(香爐) ·수반(水盤)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이 사찰은 대체로 9세기에 창건되었고 15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산백과)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두산백과)
청주용화사석불상군보물제985호
충청북도 청주시 사직동
용화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군.
(지식백과)
한군데 모셔났던것을 지금은 두군데로 나눠져 있었다.
사진을 내부에서 담기가 용이하지 않아 데리고 온사진.(한국중앙연구원)
용화사 석불상군 모두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1.4m 되는 좌상 한 구를 제외한 나머지 불상들은 최고 5.5m에 이르는 거상들이다.
이 불상들은 원래 무심천
냇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고종 광무 5년(1901) 엄비의 꿈에 의해 용화사에 옮겨졌고, 1972년 현재의 미륵보전을 짓고
봉안하였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된 이 칠존석불들은 모두 통견의 법의를 걸친 입상과 좌상으로, 불신이 우아하고 정제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최저 1.4m에서 최고
5.5m에 달하는 이 칠존불들은 현재는 모두 시멘트로 대좌를 만들어 안치하고 있는데 장륙불 또는 그 이상의 거대한 불상이란 점과 함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서 귀중한 고려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식백과)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두산백과)
용두사지철당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든 지주는 높이 4.2m이며, 철당간 높이 12.7m, 철통 높이 0.63m, 철통지름 0.4m이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을 말한다.
신라시대 이후로 사찰의 건립과 동시에 많은 당간이 설치되었으나 대개 석조로 된 지주만 남아 있고 당간은 없어졌다. 철당간으로는
보물 제256호인 공주 갑사(甲寺)의 철당간과 경기유형문화재 제39호인 칠장사 당간, 이 용두사지 철당간 3개만이 남아 있다.
(두산백과)
괘불을 걸기 위하여 절앞에 세웠던것으로 명문이 있는것으로는 한국에서 유일하다.
천년이 넘게 보존되고 있는 주철기술은 물론 "준풍" 이라는 고려독자 연호와 "학원경"등의 교육관련 기록을
확인할수 있어 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에서)
당간의 지주는 화강석으로 양
지주가 마주 서 있고 그 사이에 원통 모양의 당간 20개를 연결시켜 철제당간을 세웠다.
양 지주는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롭지 않도록 변화를 주었고, 지주의 맨 위쪽에는 고정 장치를 만들어 당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철당간의 밑에서부터
세 번째의 철통 겉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銘文)에 따르면 962년(고려 광종 13)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철당간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청주에는 홍수가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자, 이후로는 홍수가 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불렀다 한다.
(두산백과)
용두사지 철당간이 네비게이션에 안나와 철당간 떡볶이를 치고 가서 찾게 되었다.
그덕분에 그곳에서 간단히점심을 해결하는 인연을 주었다.
단재신채호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두산백과)
1993년 11월 5일 충청북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丹齋影堂) 혹은 단재영각(丹齋影閣)으로 불린다. 영정은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것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이다.
(두산백과)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主筆)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입구의 외삼문(外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으로 ‘精氣門(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나란히
놓인 3개의 석조계단 위에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마루가 깔린 통칸방에 분합문(分閤門)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즈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두산백과)
*“너의 것”
신채호
너의 눈은 해가 되여
여기저기 비치우고 지고
님 의 나라 밝아지게
너의 피는 꽃이 되여
여기저기 피고 지고
님 나라 고아지게
너의 숨은 바람되여
여기 저기 불고지고
님
나라 깨끗하게
너의 말은 불이되여
여기저기 타고 지고
님
의 나라 더 워 지게
살이 썩어 흙이 되고
뼈는 굳어 돌아 되어라
님
나라 보태지게
천진(天津)에서.
[
신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였던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호석이 없는 아담한 봉분 앞에 한용운(韓容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상석(床石)을 놓았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明燈石) 1기,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서 있다.
(두산백과)
님나라
도종환
살아서 언제나 불꽃처럼 뜨거웠고
죽어서 더욱 꼿꼿했던 당신
살아서 한 번도 비굴하지 않았고
죽어서 더욱 형형하게 빛나던 님
우리가 이땅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할 지 가르치신 당신
내 모든것 님나라에 바쳐
영원히 사는 목숨의 의미를
바람 불 때마다 가르치신 당신
아~~님이시어
아~~님이시어
아~~님이시어
(단재기념관에 있던 도종환님의
시)
사당앞동상
단재사당
단재기념관
고향이 충주라서 청주의 이미지는 늘 가보지 않고도 자주 드나들었던 느낌이 있는
곳이다.
고등학교때 몇번와보고 나이들어서는 그냥 지나가기만 했고 경조사가 있을때 가끔
들렀던곳이다.
낯설지 않게 다가왔지만 낯설게 느껴짐이 이상하다.
기대했던 청주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때는 늘 교육도시라는 고정관념으로
있었다.
답사를 다니다보니 답사?주제가 많은곳을 좋아하게 되는데 생각보다는 성에 차지
않은느낌이다.
욕심일까?
생각하면서 그동안 다녀온곳에 대한 기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딜가나 생각하지 못했던것들...
몰랐던것을 새로 알아감에 대한 감사함은 어디든있다.
친구와 청주역에서 이른아침 만나 산사입구에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이른 아침
산사를 시작으로 답사할때 그 쾌감?과
신선한느낌이 지금도 남아있는듯하다.
시간이 흘러도 위대한 생각은 녹슬지 않는다고
합니다.
답사를 다니면서 더욱더 많이 느낍니다.
행복한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