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 듣고 따라 말하며 쓰는 초등 한자 쓰기 노트 ]
채봉이와 함께 떠나는 석굴암 여행
석굴암, 어디까지 가봤니?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석굴암을 보러 가보면, 안타깝게도 그저 유리 너머로 볼 수밖에 없지요. 왜 석굴암은 이런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석굴암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이나 중국의 둔황석굴처럼 큰 규모도 아닌데 왜 유네스코에 등재될 만큼 가치가 잇는 것일까요? 오늘은 석굴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눠 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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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石窟庵)의 창건 설화
예전에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은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이 소년의 이마는 큰 성처럼 넓어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지어주었답니다. 소년은 가난해서 다른 집 머슴살이로 마련한 작은 밭을 일궈 먹고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돌려받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대성은 어머니와 상의해 작은 밭을 스님에게 바치기로 했어요.
그로부터 얼마 후 대성이가 죽었는데,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라는 아이가 너희 집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라고 말이죠.
몇 달 후 김문량의 집에서는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기는 한 손에 ‘대성(大城)’이라고 새긴 금패를 쥐고 있었다고 해요. 김문량은 아이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도록 했어요. 훗날 신라의 상대등이 된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고 해요.
석굴암에 숨겨진 진실들
▶ 석굴암 수치의 과학성
석굴암의 과학성을 제일 먼저 밝혀낸 것은 일본인 요네다 미요지입니다. 경술국치로 조선의 문화유산들이 일본 소속으로 가면서, 요네다 미요지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직원이 되어, 우리나라 옛 건축들을 측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측량하면서, 옛날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자가 당척(唐尺)이라는 사실도 알아냈고, 석굴의 구조는 더 자세히 연구할수록 무서울 만큼 본존불의 크기와 위치, 광배의 위치, 대좌의 높이 등의 수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네다 미요지가 실측한 석굴암의 평면도와 입면도 (신라역사과학관 내)
▶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과학성
신라인들은 자연적으로 습기가 없어지도록 석굴암을 설계했어요. 감실의 보살상 뒤로 나있는 열 개의 구멍을 통해 바람을 통하도록 하였고, 바깥벽을 돌과 흙으로 덮어 석굴암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하였어요. 석굴암 바닥 아래로 영상 9도에서 13도의 차가운 샘물을 흐르게 하여 공기 중에 있는 습기를 아래로 끌어내려 벽면이나 각 조각상에 물방울이 맺히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 광배의 위치
불상의 뒤에 자리 잡은 광배는 몸에서 나오는 빛을 나타낸 것으로 신비함과 위대함을 상징합니다. 보통 광배는 불상뒤쪽에 붙어있는데, 특이하게도 석굴암 본존불의 광배는 불상과 떨어져 있습니다. 불상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불상을 떠나지 않고 빛을 비춥니다.
당시 어느 조각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런 특색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광배가 타원형이라면 믿으시겠어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봤을 때, 물체가 실제보다 짧아 보이는 현상까지 감안해 타원형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리하여 위로 올려다 볼 때 타원형은 오히려 원형으로 보인답니다 ^^
▷ 신라역사과학관에 있는 석굴암 축소모형.
자세를 낮추어 스님의 위치에 서서 보면 불상 뒤의 광배가 잘 보입니다.
◎ 석굴암의 위치
토함산 동쪽 산자락 해발 565미터상에 세워진 석불사의 석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동남 30도입니다. 신라사람들은 이미 석굴 구조에서도 보았듯이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짰기에 그 위치 역시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석굴의 방향은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남천우 박사가 논문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옛 신라 사람들은 한 해의 시작을 양력 1월1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음(陰)이 쇠하고 양(陽)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는 동짓날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옛 신라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모습이 훨씬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석굴암의 아픈 역사들..
현재 에어컨 신세를 지고 있는 들어가 볼 수도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천년동안 잘 지내왔던 석굴암이 이런 신세를 지게 되었을까요? 석굴암에는 일제에게 모진 수모를 당한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험난한 일을 많이 겪었답니다.
▶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문화재 약탈
이토 히로부미는 도굴의 장본인이라 해도 될 만큼 우리나라의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본 천황과 귀족사회에 선물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파괴되는 불행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서 도굴꾼과 문화재 약탈범들은 기승을 부리게 되고, 어느새 석굴암의 존재를 알게 된 도굴꾼들은 감실에 안치된 불상 중 두 개를 가져갔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본존불 밑바닥에 복장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존불 궁둥이 부분을 무참하게 정으로 찍어 깨뜨렸어요. 지금은 다시 붙였지만,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지요.
▶ 2대 통감 소네 아라스께의 도굴
소네 통감이 석굴암에 갔다 오고 난 뒤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 오층소탑이 온데 간 데 없이 증발해 버렸습니다. 소네 통감의 도둑질과 관련해 여러 사람의 증거가 남아있지요. 석불사의 석굴을 탐방하고 소탑까지 훔쳐간 소네 통감은 석굴의 보수과 보존을 검토하면서 그 결론으로 석굴의 불상을 모두 서울로 옮기려는 구상까지 했다고 합니다.
▶ 테라우찌 총독의 보수공사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첫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찌는 처음으로 석굴암 보수공사에 들어갑니다. 우리문화재를 노략이 아닌 관리체계로 들어간 것이지요. 석굴암의 최우수 유물인 천장의 3분의 1정도가 추락하여 불상을 더럽히고 있으니, 콘크리트를 박아 석상을 보존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로 인해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 해체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콘크리트벽을 세우기 위한 굴토작업을 하면서 샘물이 석굴 뒤쪽의 암반을 관통하여 지금 석굴암 공토에 있는 감로수로 흘러내리는 오묘한 뜻을 이해 못한 채, 아연관으로 배수로를 만들어 밖으로 빼내게 됩니다. 본래 석굴의 외벽은 옥석(玉石)또는 절석(切石)으로써 이중으로 쌓아올려 내벽을 두껍게 포장하여 석굴 내부의 공기가 숨을 쉴 수 있게 하였으나, 일본인의 기술로는 불가능해 콘크리트 외벽으로 발라버립니다.
보수공사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은 석굴 보존에 치명상을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 때문입니다. 게다가 석굴내부가 콘크리트 벽으로 인하여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증기세례를 맞는 석굴암
신식기술로 새 단장을 했다는 자랑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굴내부에 습기가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차에 걸린 보수공사를 했으나 석굴 안에는 푸른 이끼가 끼기 시작했으며 육안으로도 그 손상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7년 증기사용에 의한 세척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보일러를 제작 설치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끼는 끊임없이 생겨났고 석굴은 몇 차례 더 증기 세례를 받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됩니다.
▶ 우리나라의 손으로 넘어온 석굴암
우리나라 손으로 넘어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쉽게 손을 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에 이르기 전까진 우리나라도 증기세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게 배수구를 강화하고, 습한 공기를 막기 위해 앞쪽에 목조 건축을 세웠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바닥에 차가운 샘물도 없고, 지붕은 이중 콘크리트 돔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스스로 온도를 조절 할 수 없어서 에어컨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석굴암의 여러 가지 이름들
석굴암은 수굴암, 암굴암, 전굴암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게 됩니다.
수굴암(水窟庵) : 석굴암 내의 누수는 물론이고 습한 공기까지 유입되어 석굴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림으로 수굴암
암굴암(暗窟庵) : 밀폐가 되어 어둡다는 이유로 암굴암
전굴암(電窟庵) : 에어컨을 가동하는 전기시절에 의한 강제방식을 취함으로 인한 전굴암
석굴암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함부로 석굴암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그때 당시의 기술만 믿고 섣불리 손을 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함부로 석굴암에 손을 대지 못한 채, 최소한의 습기 제거만을 위해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지요. 물론 에어컨을 가동함으로 인한 진동으로 석굴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은, 그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석굴암과 관련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분들이 있어요. 바로 김효경 박사와 석우일 사장인데요.
김효경 박사는 석굴의 습기와 이끼 문제를 기계설비라는 강제 작용에 의해 해결하신 분입니다. 물론 기계설비가 장기적으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김효경 박사는 자신의 할 일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게까지 아직도 작업의 사후감독을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재관리국이나 석굴암 측에서 출장비를 준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석우일 사장은 신라역사 과학관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석우일 사장은 누구보다 경주를 사랑하고 신라인의 슬기에 감복하여 그 위대한 유산을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만들어보는 꿈을 갖고 석재상으로 번 돈을 여기에 투자하여 신라역사 과학관을 세웠지요. 그래서 그곳에 가면 석굴 모형도를 직접 볼 수 있고, 석굴구조의 과학성과 치밀함을 8개의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이분들의 모습을 본 받아, 우리의 미래에는 더 나은 문화재로 재탄생되길 바라며, 아이들과 시간이 날 때 석굴암과 신라역사 과학관을 둘러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아이들 가슴속에 저절로 애국심이 솟아나올 것만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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