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우리나라에는 큰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유교와 철저한 신분제로 유지되던 사회는 새로운 사상이 흘러들면서 점차 흔들리고,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던 외세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만민 평등과 외세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과 이후 의병 활동까지, 강원도를 거점으로 한 민초들의 외침에 귀기울여본다.
- 만민 평등을 외친 농민들의 푸른 꿈
홍천군 풍암리에는 진등, 혹은 자작고개라 불리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 중 목숨을 잃은 농민들의 시체가 썩어 내려앉아 잦아진 고개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전투 중에 흘린 피가 골짜기마다 자작하게 고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연이건 간에 이 고개가 핏빛으로 물들 만큼 큰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사망자들을 암매장했고, 큰 비가 오면 인골이 드러나 이 지역은 마을 사람들조차 출입을 꺼리게 됐다. 그러나 현재는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와 너른 잔디밭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정비가 시작되면서 유골을 모아 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워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잔디밭에 앉아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듯한 형상의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바라보며 그날의 치열했던 동학농민운동을 떠올려본다.
부패한 양반 사회에 반기를 들고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농민들은 목숨을 내놓고 치열하게 싸움에 임했다. 그러나 조정의 지원을 받는 관군의 막강한 전력에 비해 농민들의 군대는 보잘 것 없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기개만큼은 하늘을 찌를듯했지만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은 경험도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농기구를 들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나선 농민들이 처절함만으로 전쟁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1894년, 이곳 풍암리 전투에서 농민군은 800명 넘게 희생되었고, 오래 가지 않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 동창마을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19년 4월 3일, 홍천 지역에는 또 한번 민초들의 거센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물걸리의 동창마을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기미만세공원은 소리 없이 그날의 외침을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렇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에 이곳은 한양 도성으로 가는 대동미가 한강을 따라 운반되기 전 모이는 조창이었다고 한다. 동쪽에 있는 창고라는 의미로 마을 이름도 동창마을이 됐다고 하니 그제야 이해가 된다. 당시 동창마을은 생선과 소금이 거래되던 주요 길목으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300여 필의 말이 쉬어갈 정도로 큰 마방(馬房)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전국으로 퍼진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이곳 동창마을에도 전해졌고, 3·1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뒤 동학교도이자 이곳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김덕원은 또 한번의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4월 3일, 주변 다섯 마을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군중을 향해 마구 총을 쐈고, 결국 8명이 숨을 거두고 20여 명이 중상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63년, 마을 사람들은 이날 희생된 8인의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팔렬각(八烈閣)을 건립해 그 뜻을 기리고자 했으며, 1990년에는 그날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미만세상이 건립돼 그 기상을 다시 전하고 있다.
- 초기 의병의 사상적 기틀을 다진 의암 류인석
외세에 항거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민중은 의병을 일으켜 보다 조직적으로 행동에 나섰는데, 홍천, 춘천, 원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의병의 최대 근거지기도 했다. 춘천 가정리에 위치한 의암 류인석 유적지로 향한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난 류인석은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이자 위정척사 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류인석을 비롯한 제자들은 이후 '화서학파'를 이루어 초기 의병 활동의 사상적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자연스럽게 이 일대는 의병의 근거지로 확산돼갔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길목인 데다, 산세가 험해 일본 군사들의 눈을 피해 군사훈련을 하기에도 맞춤이었을 것이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기점으로 의병 운동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한때 류인석의 의병대는 3,000명을 넘어서는 규모였다고 하니 외세의 침략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가정리에는 의병마을이라는 이름의 이야기길 코스가 조성 중이다. 의병이 태동했으며, 큰 세력을 이루어 훈련을 하고 일제와 맞서 싸우던 흔적을 이어, 강인했던 그들의 정신을 전하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진 흔적을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도를 들고 작은 표지판을 따라 곳곳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 옛날 일제의 눈을 피해 숨어 활동했던 의병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의병마을의 중심이자 시작인 의암 류인석 유적지는 우리나라 유일의 의병학교가 있어 어린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기 있게 일어선 옛사람들의 의병정신은 오늘을 사는 어린 학생들에게 리더십과 도전정신을 가르쳐주는 거울이 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전한다.
- 용맹한 군관,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원주시 봉산동에는 또 한 명의 의병장이 잠들어 있다. 류인석이 성리학자였던 것에 반해 관동창의대를 이끌었던 민긍호는 군관 출신이었다. 그는 1907년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려 하자 병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렇게 조직된 의병대는 추후 전국 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민긍호의 의병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이듬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백성들이 힘을 모아 큰 목소리로 자유를 외쳤던 운동들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실패 속에서 작고 힘없는 존재였던 민중들은 성장하고 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의병으로, 만세운동으로…… 꿈을 향해 목놓아 울부짖었던 그날의 외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 땅 위에 자유롭게 두 발을 딛고 사는 것이리라.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목숨 바쳐 바랐던 평등한 사회와 비리 척결, 외세로부터의 독립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그들의 희생 앞에 다시 고개 숙이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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