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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과의 싸움이다. 9.11 테러를 다룬 영화라면 그 사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고,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을 보기로 했다면 그의 이전 영화들을 본 경험이 있을 때 훨씬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처럼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취향'이나 '시각'과 별개로 '경험'과 '학습'의 축적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축적된 것이 많을수록 '나는 왜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스트레스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을 꼼꼼히 다 읽으면 당신의 '영화를 보는 눈'이 확 뜨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 감독이나 작품별로 쓴 여러 글들 또한 '영화'라는 거대한 세계 앞에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지은이의 말' 중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
이젠 영화가 일상이 된 시대이다. 멀티플렉스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평균 영화관람 횟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게다가 소위 '다양성 영화'라는 시대적 요구로 '더 높은 수준의 영화보기'라는 이슈가 제기된다. 최근 들어 영화기자, 비평가, 전문가 등이 주축이 된 '관객과의 대화'라는 스타일의 개봉 이벤트도 새롭게 자리잡고 있다.
2000년 월간 영화잡지 <키노>에서 영화기자를 시작으로 라디오, 방송, 강의 등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하여 다방면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저자 주성철은 현재 주간 영화잡지 <씨네21>의 취재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화리뷰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며, SBS TV <금요일엔 수다다>에도 출연했다.
이 책은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모아 한 권으로 엮은 일종의 영화전문가가 추천하는 영화감상법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도록 '영화에 어떻게 접근하면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또 영화를 보면서 당장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운 호기심으로 남을 수 있는 비법을 보여준다. 따라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기본적인 재미와 더불어 영화를 더욱 멋지게 향유하기 위한 방법을 얻게 되는 유익한 기회가 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좋아하는 영화를 2번, 3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그 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
언제부턴가 '시네마테라피'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영화치료' 혹은 '영화를 통한 힐링' 정도로 번역되는데, 영화를 통해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전문상담사와의 대화보다 더 유익한 자기치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비르기트 볼츠 박사가 쓴 <시네마테라피>의 부제는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의 힘'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영화를 통한 '치유'와 그를 통한 '변화'이며, 그것은 결국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마법'이다. 바로 그 마법이라는 측면에서 영화 속 사건, 혹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감정이입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꿈결 같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 겐 지옥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와 심리는 '마술'처럼 한 몸으로 만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적합한 영화를 선택하는 일이다. 아들을 교도소에 보낸 어느 흑인 어머니에게 <쇼생크 탈출>을 보여주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바랐지만 오히려 영화를 다 본 후, "그 애는 영화에서처럼 성폭행을 당할 거예요"라며 큰 소리로 울기만 하더라는 비르기트 박사의 실패담 일화에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질감이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나는 영화 속 인물에 비해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즉 남의 시련을 통해 얻게 되는 안도감 말이다. 아무런 가망도 없는 교도소에서 기어코 탈옥에 성공하는 <쇼생크 탈출>의 앤디를 보면서 느끼는 내면의 소리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선다.
영화에는 불필요하게 삽입된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불필요한 인물, 별 의미 없는 잉여 장면이나 사건 등이 눈에 거슬릴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쉽고도 어렵다.
우리가 사진이나 미술의 특정한 이미지 혹은 영화를 볼 때, 이유 없이 끌리고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계시가 느껴지는 그 날카로운 감정을 푼크툼이라 부른다. 특정한 영화를 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지만, 오직 관객 혼자만 느끼는 절대적이고 개별적인 효과가 푼크툼이다. 한 영화에 대해 각자 좋아하는 장면이 다르고, 별점을 0개부터 10개까지 다 다르게 매길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특정 영화에 대해 느끼는 '필feel' 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영화감상'을 넘어 '영화읽기' 혹은 '영화로 세상읽기'라는 표현도 있는 것처럼, 더 나은 영화감상을 위해 중요한 것은 '지식'과 '해석'이다. 결국 영화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세상과 현실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며, 남들이 보지 못한 자기만의 해석을 더할 때 비로소 나만의 영화가 완성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인가? 2013년 관객 1천만을 돌파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1993년 이반 라이트만이 주연이었던 <데이브>와 비교되었던 것이다. 즉 왕과 대통령의 대역이 존재하고, 각각 퍼스트레이디와 중전과의 밤자리가 소원하고, 대역이 진짜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는 점이 표절 이유였다.
물론 설정이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야기가 다르다. 표절 시비의 단초는 영화 <광해>의 당초 감독으로 내정되었던 강우석 감독이 사전 인터뷰에서 수차례 <데이브>를 언급함으로서 비롯됐다. 이후 강우석 감독은 추창민 감독으로 교체된다. 사실 더 멀리 보자면 두 영화 모두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대역을 모방한 셈이다. 이런 시비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역설적으로 영화는 모방 위에서 새로운 창조 작업을 하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영화에는 표절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오마주'와 '패러디'라는 거대한 세계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중요한 미학의 한 갈래로 존재한다. 가령 <킬빌>에서 우마 서먼이 입은 노란색 트레이닝복은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입었던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망유희>를 베꼈다기보다 <사망유희>로부터 왔다고 한다. 분명 다른 사람이 창작한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도용해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발표하는 표절에 해당하지만 일찌감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스스로 '출처'를 밝혔다는 점, 그리고 최근 들어 그런 표절의 문제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의 문제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혐의를 비켜간다.
한국영화계가 바로 그 도덕과 윤리라는 측면에서 갈수록 무뎌지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어쩌면 미래의 영화감독이 아류와 주류 사이에서 '디렉터'로 남느냐 '에디터'로 남느냐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온 건지도 모른다. 자고로 예술가라면 여전히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갈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어떤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 영화 <생활의 발견>(2002년) 중에서
로봇에 대해 인류가 갖고 있는 최초의 판타지는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데 있었다. 로봇이란 단어의 어원은 체코어 '로보타'인데, 이는 일을 해주는 농노나 강제 노동을 의미한다. 특이하게도 로봇은 철저히 문명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필연적으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길 바라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욕망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로보캅>에서 보듯이, 로봇의 모습은 언제나 인간의 형태를 띄고 있다.
로봇의 보편화를 상업적 재미로 포장한 작품도 많다. 가령 <로봇 앤 프랭크>에서 왕년의 잘나가던 도둑 프랭크는 아들이 보낸 로봇 불청객에게 도둑질을 시킨다. 로봇이 자신의 전성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열쇠를 따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다음부터 그 짓을 하게 만든다. '로봇이 저럴 수도 있나?'라고 진지한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재미는 반감된다.
로봇의 판타지는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는 시도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에이 아이>에서 데이빗이 겪는 고통은 인간의 헛된 욕심으로 대체된다. 또한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까지 던진다. 심지어 1985년 미국의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그를 성차별 사회를 극복 하는 사회정치적 상징으로까지 제시했다. 이는 로봇을 공상과학의 세계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 부각시킨 한 사례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들의 인간답지 못한 세상에 대한 거울 같은 존재랄까. 이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오랜 경구를 '로봇은 어른의 아버지'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 같다.
스포츠영화들은 드라마틱한 구성을 위해 사실적 재현에 소홀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일약 할리우드 스타로 만든 <록키>(1976년)는 복싱을 주제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하지만 주인공이 헤비급 선수임에도 실제 선수들의 체격이나 키에 미치지 못해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영화도 동일한 약점을 보였다. 스포츠영화가 완벽한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 없다는 숙명론에 판타지를 가미한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가 탄생했다. 배우 주성치가 열연한 <소림축구>(2001년)다. 슛을 하기 위해 하늘을 날아오르고, 강슛에 골키퍼의 옷이 벗겨지고, 찬 공은 골망을 뚫는다.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마치 코미디영화다.
<넘버 3>(1997년)의 조폭 캐릭터로 충무로를 접수하더니, 한국영화의 2000년대는 송강호라는 배우를 빼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그 안에서 별다른 부침을 겪지 않고, 또한 다른 배우들처럼 TV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도 전혀 출연하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롱런하는 배우는 드물다. 그 비결은 역시 그만의 독특한 개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송강호 라는 배우는 '대사'가 아니라 진짜 '말'을 하는 사람이다"
- 류승완 감독
이는 표현력이 풍부하고 생생한 구어체를 구사하는 배우라는 이야기다. 배우는 두 종류가 있다. 관객을 긴장시키는 배우와 관객을 풀어주는 배우, 양쪽 모두 뛰어난 배우임은 분명한데 송강호는 후자다. '웃기고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든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이상한 놈' 태구, <박쥐>의 뱀파이어 신부, 그렇게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해도 언제나 사람을 편하게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한 매력이 있다.
내 말에 토토토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 무슨 말인지 알겠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 <현기증>(1958년)은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으로,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전직 경찰 스카티가 높은 건물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지면이 쑥 꺼지며 아득해지는 현기증 효과를 내기 위한 '줌 아웃 트랙 인' 기법이 처음 사용되었다. 기발한 방법으로 관객의 마음을 조종하는 데 능수능란했던 히치콕은, <현기증>에 이르러 집착이라는 주제를 동료가 죽은 후 정신적 장애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끌어와 풀어낸다. 그는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을 다룬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 영화의 아버지다. <현기증>은 2012년 영국의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10년마다 비평가와 감독으로 나누어 선정하는 '세계영화 베스트 10' 투표에서 <시민 케인>의 50년 독재(1962~2012년)를 종식시키고 1위로 올랐다.
꼭 한번쯤은 봐야 할 한국영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년)는 한국영화사 최고 걸작 1, 2위를 다투는 작품이다. 2008년 칸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팬인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 자신이 이끄는 세계영화재단을 통해 디지털 복원에 앞장섰다. 평범한 가장이 젊은 여인을 하녀로 맞이해 유혹당한 후 파국을 당한다는 내용의 스릴러물이다. 임상수 감독이 배우 전도연과 함께 리메이크해 201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기도 했다. 한편,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와 빔 벤더스 감독의 <돈 컴 노킹>을 저자가 강력하게 추천했다.
양조위, 장만옥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영화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영화를 보면서 더 많이 알고 싶다거나 더 즐기고 싶다는 갈증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럴 때 가장 권장하는 방법은 결국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란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전 작품을 보거나, 그 감독에 대한 글을 읽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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