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서도역
소설 <혼불>의 시간 속으로
‘매안마을 끝 아랫몰에 이르러, 치마폭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논을 가르며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밥 한 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
최명희(1947∼1998)가 소설 <혼불>에서 설명하는 서도(書道)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역인 옛서도역은 <혼불>의 배경지에서 1.5km 거리에 자리해‘혼불문학마을’의 길목이 되고 있다.
강모가 전주로 유학갈 때도, 효원이 이곳 매안마을로 시집올 때도 이 서도역을 밟았다.
“기차 멈춘 지 오래 됐어. 여그서는 기차 탈라문 오수나 남원으로 가야 돼.”
1934년 역무원 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서도역은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신역사가 세워져 이전됐는데, 그마저도 2008년부터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이 됐다. 옛 서도역은 1932년 준공 당시의 모습을 살려 영상촬영장 등으로 활용, 보존되고 있다.
2010년에는 역과 서도마을을 중심으로 마을미술 프로젝트 ‘마안, 서도가 좋아졌등교?’가 펼쳐지기도 했다.
역 매표소는 ‘기억의 방’으로 꾸려졌다. ‘오늘 만난 돌멩이를 만나듯, 살면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을 만나기를 바라요.’ 그런 뜻을 담은 수많은 돌멩이들, 이곳을 찾은 이들이 저마다의 추억을 새겨놓은 돌멩이들을 들여다본다.
철로 옆 기차길 따라 책장을 펼치듯 소설 속 장면들을 옮겨 놓은 조각작품들을 따라 걷노라면<혼불> 속의 그 사람들이 곁에 있는 듯 생생하다.
욕망과 속도에 휘둘려 모두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혼자 외로이 ‘근원’을 거슬러 올라갔던 작가 최명희. 이제 기차는 떠나지 않으나, 마음은 한량없이 먼 곳을 헤매이게 하는 서도역이다.
- 보성 명봉역
당신의 드라마를 이곳에서
“전에는 역 앞에 가게들이 많았어. 면사무소랑 파출소도 다 있었고, 오일장터도 있었고, 택배, 용달, 약방까지 다 있었제.”
1930년 영업을 시작한 경전선 명봉(鳴鳳)역은 2008년부터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간이역이 됐지만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6회 닿는 역이다.
이 역이 항시 정갈한 것은 명봉역 명예역장인 김호 할아버지의 비질 덕분이다. “겨울에 눈쌓이면 길 쓸어놓고 인자 사람 통하겄다 허고 뒤돌아볼 때”를 ‘고생’이라 하지 않고 ‘즐거움’이라 말하는 이다.
“내 고향이 여기 보성읍이라. 광주서 자취할 때 주말마다 남광주역에서 보성읍까지 다녔제. 칙칙폭폭 석탄으로 움직인께 두 시간 가까이 걸려. 무임승차도 많이 했어. 차장들이 알고도 모른척했제. 없는 사정 안께.”
근동의 명봉 학동 신천 3개 마을 할머니들은 한사코 “기차 있어서” 자식들 가르쳤다 하신다. “콩이야 팥이야 한 되씩 두 되씩 이고 나가서 그 놈 팔아서 돈 샀제.”
남광주선이 없어지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때는 남광주역 새벽장에 대려고 어머니들이 보따리보따리 이고 줄을 섰어요. 우리는 열차를 제시간에 보내야 하니까 정신없이 짐을 올려드리고 그랬죠.” 보성역 역무원 문태현씨는 경전선에서 남광주역 닿는 모든 역의 풍경이 비슷했노라고 회상한다.
“기차는 마을사람들 발이고, 대합실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난로 피운께 동네 사랑방이었제.”
커다란 벚나무들이 역사 앞에 나란한 명봉역은 드라마 <여름향기>의 촬영지로 소문이 나서 봄이면 사람꽃 덩달아 피어나 저마다의 드라마를 찍고 간다.
“내년에 벚꽃 활짝 필 때 꼭 다시 와 잉!”
‘내년 봄, 벚꽃 활짝 핀 날’이라고 향기로운 초대장을 가슴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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