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전주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경기전의 큰 나무들과 오래된 기둥들은 나에게 시간을 분초 단위가 아니라 백 년 천 년의 단위로 느끼게 했다. 그 나무들 아래서 나는 늘 저 먼 시간이 그리웠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1947∼1998)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저 먼 시간'을 향한 그리움을 안겨주는 나무들. 수수 백년의 숨결을 품은 울울한 나무들이야말로 경기전이 고요히 베푸는 미덕이다.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모신 곳'이라고, 책이나 사전이나 표지판이 일러주는 한정된 설명 말고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니. 가을이라면 깊어가는 아름다움 가득하다. 은행잎 엽서도 '수신'하시라. 지천으로 흩날린다. <늦가을의 노란 은행나무 잎은 그대로 수천 년간 누군가에게 배달된,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엽서요, 나뭇가지는 집배원의 손이며, 몸통은 그대로 우체국…>이라고 말한 사람은 지리산 시인 이원규.
-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
전주 한옥마을에 시간의 깊이를 더해주는 경기전(사적 제339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제317호)을 봉안하기 위한 누전(樓殿)으로, 1410년(태종 10년) 지어졌다.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건축물은 원래 개성·영흥·전주·경주·평양 등 다섯 곳에 있었지만, 경기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다.
경기전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14년(광해군 6년) 다시 세웠다. 정전의 붉은 박공벽에 앙증맞게 조각된 '자라 한 쌍'도 놓치지 말길.
자라는 한자로 왕팔(王八)이라고도 하니, 왕의 뜻과 살핌이 조선 팔도 온 나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다. 또 자라는 물에서 사니, 건물이 화(火, 禍)를 면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뜻도 담겼다.
어진박물관에서는 태조 어진의 봉안과 관련된 각종 유물과 내력을 비롯해 영조·철종·고종의 어진 모사본 등도 한데 만날 수 있다.
경기전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했던 전주사고(全州史庫)도 있다. 오랜 벗처럼 은행나무 한그루가 이웃해 있는 자리.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불타버렸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화를 면해 역사의 기록을 전할 수 있었다. 태인의 유생들인 손홍록과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지켰기 때문. 실록에 담긴 엄정한 기록정신과 그 기록들을 지켜내기 위해 기울여졌던 헌신을 돌아보게 하는 공간이다. 전주사고는 정유재란 때 결국 소실됐으며 지금의 건물은 지난 1991년 복원한 것이다.
- 전동성당
붉은 벽돌 아름다움 돋보이는 서양식 근대건축물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양축을 이루는 것은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이다. 수평으로 펼쳐진 경기전 마당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 마주치는 수직의 풍경.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며 이곳에 깃든 시간의 숨결을 역동적으로 엮어낸다.
붉은 벽돌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원래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던 자리이자,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이기도 한 터에 세워졌다.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충돼 있는 건축물로, 당시 순교자들을 스테인드글라스에 한복을 입은 조선 사람의 모습으로 담아낸 점도 의미있다. 영화 <약속>의 촬영지로 알려진 뒤 찾는 발길들이 더욱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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