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들을 하나로 묶는 단어는 '소신'이다. 소신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의 서늘한 징표였다. 호남 선비들이 걸었던 절의의 길을 따라 걷는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음모의 세상에서 선비들은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패한 현실 앞에 제 모든 것을 내놓고 싸웠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진정한 선비에게는 개인과 사회가 둘이 아니었다. 개인적 삶 속에 사회적 삶이 있었고, 사회적 삶 안에 개인의 삶이 깃들었다. 죽음의 겁박인 사약도 선비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실천으로 말의 뼈대를 삼았으므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호남의 선비들을 찾아나서는 길은 무등산 북쪽 능선에서 시작한다.
- 충장사
충효로써 죽음을 삼았던 김덕령
무등산 자락 충장사(忠壯祠)에 간다. 봄이면 신록이 싱그럽고 여름이면 백일홍의 붉음이 빛나고, 가을이면 단풍 호젓하게 물드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1567~1596)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다. 김덕령은 조선 의병의 총수였다. 겹치는 음모의 늪에 빠져 의병장 김덕령은 엿새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매는 먼저 살을 파고 들어와 정강이뼈를 부숴 놓았다. 매는 자백을 강요했지만 그는 지은 죄가 없었으므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596년 8월21일, 김덕령은 형장에서 옥사했다. 끝내 고문을 이기고,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했다.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죽음 앞에서 끝까지 초연했다.
김덕령의 혐의는 역모였다. 1596년 여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7월14일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전령을 받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 김덕령이 함양을 거쳐 운봉을 목전에 둔 것은 7월17일, 그때 이미 반란군이 진압되었다는 도원수 전령이 다시 도착했다. 김덕령은 군사를 물려 진주로 되돌아간다. 진주 군영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음모였다. 도원수 권율은 반란군에 가담한 혐의로 김덕령을 체포해 옥에 가뒀다. 김덕령은 영문도 모른 채 역모의 배후가 됐고, 옥에 갇혔다.
충장사 유물관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지극한 사랑이 있다. 김덕령의 의복이다. 김덕령은 장례조차 쉽지 않았다. 조정에서 감시의 목적으로 사람을 보냈다. 역모자는 마지막까지 편하게 떠날수 없었다. 조정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장례를 치렀다.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는 직접 만든 수의를 죽은 김덕령에게 입혔다. 그 수의는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됐고,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됐다.
김덕령의 무덤에는 잔디만 푸르다. 1661년 김덕령은 누명을 벗었다. 현종이 그의 신원을 허락했고, 병조판서를 추증했다.
김덕령의 서늘한 한을 완전하게 녹여낸 임금은 정조다. 1788년 정조대왕은 김덕령에게 시호 '충장공'과 '정려비'를 내리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충효리'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1789년에는 종1품 좌찬성을 추증했다. 김덕령은 죽고 나서 200년이 지나서야 하늘 아래 부끄럼 없는 이름을 남겼다.
-환벽당
선정으로 백성을 품었던 김윤제
사방에 푸른 대숲을 두르고 있다 하여 환벽당(環碧堂,광주 환벽당 일원, 명승 제107호)이라 이름붙였으리라.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다.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의 남쪽이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1501∼1572)는 식영정을 지어 장인인 임억령을 모신 서하당 김성원의 삼촌이다. 그는 김덕령의 정신적 스승이었고,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김윤제는 김덕령의 종조부였다.
환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지극한 정치를 현실 안에서 실현하려 나섰던 호남 선비들의 정신을 새기며 오른다. 환벽당은 16세기 호남사림들의 집결지였다. 주인 김윤제는 덕이 깊었고, 명망이 높았던 선비들이 그를 찾아 환벽당에 자주 모였다. 송순·양산보와는 오랜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김인후와 기대승 역시 김윤제와 막역한 사이였다. 정철은 그의 손으로 키워졌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어느 날 김윤제는 점심을 먹고 낮잠에 빠졌다.
꿈이 이상했다. 아래 개울에서 청룡 한 마리가 승천했다. 꿈은 현실처럼 선명했다. 김윤제는 하인을 시켜 개울로 나가보게 했다. 웬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더라고 하인이 고하자 김윤제를 그소년을 데려오게 했다. 그 소년이 정철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을 제자로 삼아 10년을 가르쳤으며 훗날 손주사위의 연을 맺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환벽당은 공 들여 지은 정자다. 환벽당에 달이 뜨면 닫혀 있던 세상이 열린다. 바람이 선비의 정원을 거닐고, 댓잎이 조용히 떨어진다. 눈을 감으면 달이 하늘을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백일홍은 조용히 백일을 피었다 지고, 동백은 붉은 모가지를 떨어뜨리며 죽는다. 작은 연못에서는 물이 바람에 쓸린다.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는 호남 사림의 정점이었다.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지냈던 그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아주 벼슬을 버렸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나주목사였다. 그는 삶의 가치가 뚜렷했던 사람이다. 중앙에서 벼슬을 할 때는 조정에서 뜻을 폈고,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는 선정으로 백성을 품었다. 늙어서 벼슬을 버린 뒤에는 젊은 선비들을 가르쳤다. 김윤제의 후덕함은 백성들에게도 뻗었다. 그는 백성들이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짓도록 ‘강남보’를 막았다. 또 자신의 재산으로 관개수로를 개통해 가뭄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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