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아니라 금석고증학,경학,불교,회화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이곳은 김정희 선생이 55세가 되던 해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먼 유배길에 올라 약 9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지난 2007년 10월 사적 제 487호로 지정되었다.
추사 선생은 이곳에 8년 3개월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창신"하여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내었다.
(안내책자에서)

비가왔던 관계로 사진이 허접하지만....(세한도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다고한다)
제주추사관은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가리기위해
지난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제주추사관의 전신은 1984년 제주지역 예술인들과 제주사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추사유물전시관이다.
그러나 전시관이 낡은데다,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그 격에 걸맞게 재건립되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새롭게 지하2층 지상1층 규모로 제주추사관을 완공하였다.
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추사동호회등에서 기증해주신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글씨,추사편지글씨,추사지인의 편지글씨등을 전시하고 있다.
(안내문설명에서)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1840년(헌종 6)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두산백과)

2층으로 올라오면서 살짝 담았다.
자연광을 그대로 받아드릴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는 모습이다.

세한도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이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藕船)!!
이 《세한도(歲寒圖)》는 완당(阮堂)이 1840년(헌종(憲宗)6년)에 윤상도(尹尙度)의 투옥 사건에 관련되어 제주도(濟州道)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59세 때(1844년)의 작품으로서, 당시 청(淸)의 연경(燕京)에서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일품이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권세를 따르는 세속과는 달리 문하의 구의(舊宜)를 잊지 않고 궁경(窮境)의 완당(阮堂)에게 정의(情宜)를 다하는 데 감격해서 세한(歲寒)(겨울에 홀로 푸른 소나무)에 비유한 그림이다. 이 《세한도(歲寒圖)》야 말로 그 화격이나 고고한 필의로 보아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으로 꼽힐 만하다. 그는 자제(自題)에 다음과 같이 썼다.(한국사전연구소,한국미술오천년)


학문과 예술 세계를 꽃피운 추사의 마음이 서린 곳
대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와 9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에는 태·장·도·유형과 함께 사형이 있었는데, 유배에 해당하는 유형은 사형을 면한 형벌로 죄가 무거울수록 임금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 제주관아가 있던 제주목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나, 추사는 제주목에서도 한참 떨어진 대정까지 유배를 왔으니 정쟁이 극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추사는 이곳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마음자세가 변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서 벗이었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대흥사에 걸려 있던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를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떼버리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러 예전에 자신이 잘못 보았다며 다시 걸어달라고 하고 자신의 글씨는 뒷방에 걸어달라 부탁을 하였으니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겸손한 마음을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독특한 예술성을 가진 추사체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인 세한도를 제주에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모거리(별채), 제주특별자치도 특유의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념관 쪽으로 정낭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집의 본래 정낭은 방앗간과 모거리 사이의 대문간에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서화를 남겼다.(두산백과)

2002년 4월 17일 제주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마을의 대정읍성 동문자리 바로 안쪽에 있다. 옛 대정현의 돌하르방과 김정희의 글씨 및 그림 복제품을 전시해 놓은 추사기념관이 있고, 김정희가 머물러 살던 초가 4동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 阮堂歲寒圖》(국보 180)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두산백과)





작은딸래미.
비문에 새겨진 글을 읽고있다.



추사가 좋아했다는 수선화..향이 이고을에 모두 퍼지는듯...



매화도 촉촉한 비에 봄을 재촉하고 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북학의 대가이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을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을 지내며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으나 55세 되던 해 안동 김씨 세력과 벌이던 정쟁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 된다. 유배 중에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형을 받는데 이는 지금도 담장을 두르고 있는 가시달린 탱자나무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 귀했던 제주이기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리던 인물인 추사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추사가 머물렀던 원래 집은 제주 4·3항쟁 때 불타버려 후에 복원을 했는데 제주도 민가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두산백과)

※(추사유배지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아침나절 주상절리를 지나 추사김정희유배지를 향하는중 예보된대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추사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되었다.
올해 난 새로운 계획이 우리유적지와 문화재 등 국사를 중점적으로 알아보고 사진을담으며 공부할려고 맘먹고 있던 차에 역사공부와 함께 휠링여행으로 충분했다.
학창시절에 모르고 지나쳤던 기록들을 자세히 보면서.... 이러한 인식도 나이와 시대에 따라 조금은 느낌이 다른듯했다.
내부사진을 담고 싶었지만...(사진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라고한다)
휴대폰으로 담는것은 괜찮은데 사진기로는 안된다고 한다.
추사관내의 유물과 편지 서예등 사진담는것은 포기하고 그안에서 내용을 충분히 읽는것에 시간을 할애했다.
한참을 보내고 나오니 비가 제대로 오고 있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밖의 유배지생활중 재현해놓은 살펴보며 몇장의 사진을 남긴다.
유난히 수선화를 좋아했다는 추사흉상앞에는 수선화 조화가 있었지만...
재현해놓은 유배지생활했던곳의 돌담벼락에 수선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엎드려 사진을 담는데 향기가 그만이었다.
아마도 꽃말이 "자기 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인 수선화를 좋아한 추사김정희의 힘든 유배생활이 그려진다.
이곳의 관람을 하고 나오면서 동행한 가족과 이야길 나누며 참 좋은 느낌을 안고 나왔다.
행복한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