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새 시대의 응답자, 개혁 교황 프란치스코“

이산저산구름 2013. 10. 18. 16:55

 

 

 "새 시대의 응답자, 개혁 교황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내게 가난의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승인 2013.10.10  12:19:36

“최근 몇 달 동안 제 건강이 적잖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선을 위해 가장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그분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지난 2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 사임을 선언한 뒤에 2월 27일 마지막 일반알현에서 한 말이다. 교황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의 선을 생각하면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용기가 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만큼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 결정은 충격적이면서 새로운 교회가 시작될 전조처럼 보였다.

 

   

 

▲ <교황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가에타, 성바

 

오로, 2013

이탈리아 잡지 <파밀리아 크리스티아나> 편집장인 사베리오 가에타가 최근에 펴낸 <교황 프란치스코―새 시대의 응답자>가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가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고 새 교황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책들이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되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애에 대한 간결하면서 분명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없었다. 이번 책은 그런 점에서 그동안 보여준 교황의 파격적 행보와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장이 우연의 결과가 아님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파도가 거세고 바람이 사나운데 주님은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날도 많았다”며 “그러나 저는 주님이 늘 그 배 안에 계시다는 사실과 교회라는 배는 제 것도 우리 것도 아니고 오직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처럼 우리 교회가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낡은 관행을 버려야 하는 시기에 어쩌면 하느님은 다른 뱃사람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가정의 호르헤 마리오

 

1936년 12월 17일에 이탈리아 출신의 아르헨티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호르헤 마리오(프란치스코 교황)는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니노 코스타(Nino Costa)의 ‘라사 노스트라나’(Rassa nostrana)라는 시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 이 시는 이민자들의 고된 삶과 운명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여 한 절기 손실로 망치고 노동으로 상하거나 발병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것은, 낯선 타향의 성당 뒤뜰 차가운 묘지로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리니.”

 

호르헤 마리오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13세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직물공장에서 회계 일을 보며 약간의 용돈을 벌었다. 2년 동안 청소를 도맡아 했고, 다음 해에는 공장 운영 업무에도 참여했다. 그 후 식품화학을 공부하는 기술산업학교에 등록해 아침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오후 2시부터 8시까지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가 성소를 발견한 것은 20세 되던 해, 화학기술자 자격증을 얻고 식품분석 연구실에서 일하다 중증 폐렴에 걸렸을 때였다. 고열에 시달리다 오른쪽 심장 윗부분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떠오른 말은 어릴 적 첫영성체를 준비해 주었던 어느 수녀의 말이다. “너는 지금 예수님이 겪는 고통을 뒤따르고 있는 거야.”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수녀의 이름은 고통을 뜻하는 돌로레스 토르톨로(Dolores Tortolo)였다. 몇 달 후인 1958년 호르헤 마리오는 예수회 청원자가 되었다.

호르헤 마리오는 1969년에 사제품을 받고 예수회의 청원자 수련 담당, 산호세 신학교 교수, 예수회 관구장과 산 미구엘 마시모 신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당시 학교 친구였던 호세 마리아 상 신부는 그에 대해 “그는 높은 영성을 지닌 사람으로 무척 진지하며 강의 준비를 많이 하는 교수였다”며 “새 교황을 보수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의 어느 한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예수회원들처럼 다만 “가난한 사람들과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가 1973년에 종신서원을 하고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되었는데, 이 시기가 군사독재가 시작된 때와 맞물리면서 베르골료가 예수회의 진보적인 사제들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1976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은 정당은 혁명공산당뿐이었다.

베르골료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가 된 이후인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해 주교단 이름으로 ‘내 탓’(mea culpa)이라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역사의 여러 순간에 우리는 전체주의에 관대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유 민주주의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행동으로 또는 태만으로 우리는 형제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그들을 차별했습니다. … 저희를 용서하시고 사회적 유대를 다시 형성하며 아직도 이 공동체 안에 벌어져 있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십시오.”

 

특권을 거절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 베르골료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가 된 베르골료는 직무를 시작한 처음부터 겸손함과 더불어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할 준비된 자세를 보여주었다. 교구 사제들은 그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 언제라도 교구장과 대화할 수 있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을 때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처럼, 서임식을 축하하려고 바티칸에 가겠다는 수많은 아르헨티나 신자들에게 “그 여행경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고 권고했다.

추기경이 되어서도 베르골료는 지상적인 권위에 흔히 동반되는 어떤 특권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대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방 두 칸에 작은 난로로 난방을 하는 주택에 계속 기거하면서 식사 준비도 손수 했다. 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마다하고 누구라도 스스럼없이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애용했다. 그러면서 “저는 대체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지하철을 타지만, 버스를 더 좋아합니다. 버스를 타면 거리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추기경이면서도 변함없이 일반 사제들이 입는 평범한 사제복을 입었고, 예식 때 착용하는 추기경의 전례복은 전임 추기경이 입던 옷을 여동생에게 부탁해 수선해서 입었다.

2001년 12월 20일, 그는 추기경 집무실 창문을 통해 마요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을 목격했고, 예금 인출 동결 조치에 항의하는 비무장 시민을 경찰이 봉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곧바로 내무장관과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의 부당한 진압에 항의했다. 경찰이 불안에 휩싸여 시위에 나선 단순한 시민들을 마치 선동자나 테러리스트처럼 잘못 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추기경의 항의로 비폭력단체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진압 사태가 중단되었다. 이어 추기경은 교구의 자선단체를 움직여 무료급식소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쉼터를 열고, 그들을 위로하며 교회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봉사자를 파견했다.

 

추기경은 4만5천 명의 빈민이 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판자촌에 있는 카쿠페의 성모성당에 자주 가서 미사를 봉헌하고 주민들을 만났다. 그곳 주민의 반수가 추기경과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그들과 친밀했다. 빈민촌에서 사목하던 호세 마리아 페페 디 파올라 신부가 살해 협박을 받자, 강론을 통해 협박 주동자들을 ‘어둠의 장사꾼’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교구의 400명이 넘는 사제들이 동료 사제를 위한 서명운동에 나섰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라 스탐파>(La Stampa)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자기 안에서 나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영적 병듦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탈이 납니다. 교회가 거리로 나가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여러 사건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자신을 가두고 있으면 고립된 의식으로 늙어 갑니다. 거리로 나가서 사건과 만나는 교회와 자신을 확신하는 병에 걸린 교회 중에 저는 분명 앞의 교회를 선호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세요, 프란치스코 교황

 

   

 

▲ 산 다미아노 성지의 성 프란치스코 동상 ⓒ

 

김용길 기자

2005년 4월 콘클라베에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 함께 신임 교황 물망에 올랐던 적이 있다. 세 번째 투표에서 라칭거는 72표, 베르골료는 40표를 얻었다. 베르골료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라칭거에게 표를 몰아줄 것을 다른 추기경들에게 호소했고, 마침내 라칭거가 84표를 얻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었다.

그리고 8년 후인 2013년 콘클라베에서는 베르골료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예수회 신부이자, 아메리카 대륙 출신의 첫 교황으로, 731년 시리아 출신의 그레고리오 3세 이후 거의 1200년 뒤에 탄생한 비유럽 출신 교황이었다.

바티칸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몇 분 전에 레 추기경이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교황명을 물었다. 교황의 대답은 ‘프란치스코’였다. 지금까지 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 교황이 네 명이나 있었지만, 이탈리아 수호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이름으로 선택한 교황은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마지막 교황인 클레멘스 14세가 1773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던 포르투갈 등 유럽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해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속한 수도회인 예수회의 해산 교서에 서명했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콘클라베에서 득표수가 3분의 2 이상 올라

 

갔을 때, 옆 자리에 앉았던 우메스 추기경이 자신을 안고 입을

 

맞추며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라고 한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자신의 심장에 들어왔다고 고백했다.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제게 가난의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피조물과 그리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 평화의 영을 주는 가난의 사람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베르골료는 보통 때 입는 흰색 제의를 입는 등 몇 가지 전통적인 관례를 바꾸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례 담당자가 가져온 장미색 제의를 입지 않았다. 쇠로 된 주교 십자가를 금으로 된 십자가로 바꾸어 목에 걸지 않았으며, 동료 추기경들의 축하 인사를 서서 받았다. 그에게 외적인 것보다 내용이 중요했다. 그는 이전에도 갓 사제품을 받은 신부에게 “문제는 수단을 입느냐 안 입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려고 소매를 걷느냐 안 걷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자비로운 개혁 교황,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은 첫 삼종기도에서 “하느님의 얼굴은 늘 참아 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얼굴”이라며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이렇게 이어갔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하는 데 지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분에게서 배웁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에 담긴 모토는 ‘측은이 여기시어 (나를) 선택하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다. 이를 보고 신학자 이노스 비피는 예수가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른 마태오 복음서 9장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수도승 성 베다는 잠시 멈추어 ‘따르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덧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천한 영광을 멀리 하십시오. 하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값없는 것을 전부 기꺼이 버리십시오. 모욕을 감내하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되갚지 마십시오. 받은 것들을 참고 견디십시오. 자신의 영광을 찾지 말고 언제나 창조주의 영광을 추구하십시오. 이러한 것들과 견줄 만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의 문장에 기록된 표어가 로마의 주교이며 세계교회의 목자인 교황의 직무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덧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라고 한 말이 곧 세상일에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님은 지난 7개월 동안 보여준 교황의 행보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존재하라”는 전갈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은 이미 ‘새 시대의 응답자’로서 ‘개혁 교황’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교황은 8인 위원회를 통해 바티칸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에 나섰으며, 교황대사들에게는 ‘주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출세주의자’들을 경계하라며 지역교회 주교 추천의 잣대를 제시하고 있다. 교황은 그동안 엄격한 태도로 일관했던 동성애자와 낙태 문제에 대해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사제들에게 ‘교회 밖으로 나가’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을 만나라고 독려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한 포용적 태도, 그리고 ‘가난의 영성’에 대한 높은 평가는 교황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특별히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가 깊다. 한국 교회는 최근 수년 동안 ‘사회교리 주간’을 선포하고, 정의평화위원회를 재정비하고, 다양한 사회문제의 길목에서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있다. 생태적 감각이 회복되고, 사회적 관심이 거침없이 증폭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교황과 더불어, 교황을 넘어서, 비복음적 세계 안에서 복음적으로 현존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