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꽉 막힌 교회의 숨통을 연 '나쁜' 수도자, 임인덕 신부 이야기

이산저산구름 2013. 10. 18. 16:50

꽉 막힌 교회의 숨통을 연 '나쁜' 수도자, 임인덕 신부 이야기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권은정, 분도출판사, 2012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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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02  16: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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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어린 '하인리히'를 '세바스티안' 신부로 만들었으며, 독일의 '세바스티안' 신부를 한국의 '임인덕' 신부로 변모시켰을까? 그는 왜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지구 건너편 한국의 소읍 왜관에 살고 있을까? 그는 거기서 무엇을 소망했을까? 하늘이 그의 몸과 마음을 도구 삼아 이 땅에서 이루려 한 것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 그는 행복했을까?" 

   
▲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권은정, 분도출판사, 2012
1987년 여름 자동차 사고로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는 엉덩이와 다리뼈 몇 군데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 뼈 하나가 심장을 찌르고, 또 하나가 폐를 관통했다. 왼쪽 다리는 발목 부근의 신경이 끊어져 버렸다. 진주 제일병원에서 대구 파티마병원으로, 다시 경북대병원에서 치료 받고, 독일에서 수술을 받아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목숨을 얻었다. 그는 여전히 삼청동 공소에서 한센인들을 돌보고 있으며, 1994년에 정식 등록한 '성 베네딕도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는 '베네딕도 미디어'로 개칭해 임 신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베네딕도 미디어는 그동안 융판 그림 35종, 슬라이드 120여 종, 음악 카세트 130여 종, <사진말> 9권, 이콘과 성물 40여 종, 그리고 비디오물 100여 편을 한국에 소개했다.

"피곤이 봄날처럼 밀려오면 아이처럼 졸음에 몸을 맡겼다"라고 임 신부의 상태를 표현한 권은정 씨가 최근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라는 제목으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임인덕 신부 이야기를 분도출판사 50주년 기념 도서로 펴냈다.

세바스티안에서 '임인덕'이 되어 사람을 찾아나서다

1935년 9월 22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임인덕 신부는 1954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종신서원을 하고 뮌헨대학교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한 뒤에 1965년 사제로 서품되어 1966년 7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성주성당과 점촌성당에서 잠시 사목한 뒤에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마오로 기숙사 사감을 거쳐 1972년 분도출판사 사장으로 부임했다.

다른 이들처럼 임인덕 신부에게도 삶의 구비마다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그중에서 정양모 신부는 임인덕 신부가 한국으로 파송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친구로 꼽힌다. 임 세바스티안 신부의 첫 미사를 축하해 주었던 정양모 신부는 임인덕 신부와 마찬가지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세계적 석학인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교수에게 박사 논문을 지도 받고 있었다. 당시 슈낙켄부르크 교수에게 지도 받던 아시아 학생은 정양모 신부가 유일하다. 그 인연으로 정양모 신부는 나중에 분도출판사에서 <200주년 신약성서>를 출간하고, 신학 총서를 발간하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임인덕 신부가 점촌성당을 맡고 있던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할되어 초대 교구장으로 두봉 주교가 선임되었다. 당시 안동교구 사제는 한국인 셋, 프랑스인 셋, 독일인 셋이 전부였다. 그중 한 명이었던 임 세바스티안 신부는 두봉 주교가 본당에 방문해 신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나누고, 날이 지면 시골 본당의 빈한한 사제관에서 새우잠을 마다 않고 묵어 간 것을 기억한다. 한국말을 무척 잘 하는 두봉 주교는 가난한 시골 본당 신자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으며, 본당에 방문할 때도 버스를 타고 다녔다. 두봉 주교는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농민사목을 구현하려고 애썼고, 무엇보다 사회 정의를 위해 일했다. 이를 두고 임인덕 신부는 두봉 주교가 '사제 생활의 모범'이 되어 주었다고 말한다.

"거기 누구 한국 사람 없어요?"

현장에서 직접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최민식 작가 역시 임 세바스티안 신부가 '발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분도출판사에서 <사진말>을 만들면서 최민식의 사진집을 찾아보았는데 "그가 찍은 사진에는 힘겹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포착되어 있었다." 이를 보고 임 신부는 이사야서 53장 3절에서 말하는 '그'를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사람,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멸시만 받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임인덕 신부는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 최민식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최민식은 직장을 그만두고 분도출판사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작업에 전념해 <인간> 제4집 이후 같은 제목으로 다섯 권이나 되는 사진집을 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최민식의 사진을 무척 싫어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의도적으로 피사체로 삼는다고 꼬투리를 잡아 전시 작품 일부를 철거하거나 압수하곤 했다.

1982년 <인간> 4집이 나왔을 때도 문공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 그 책 나온 거 말입니다. 최민식 사진집, 그거 너무 어둡게 나왔어요. 그대로는 곤란하니까 많이 잘라 내든지 아니면 불태우든지 해야겠어요."
"아, 그렇지요. 좀 어둡게 나왔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인쇄를 할 참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게 말이죠, 내용이 어둡다는 건데 … 허, 그것 참, 거기 누구 한국 사람 없어요? 이거 답답해서 원, 말이 안 통하는데 한국 사람 좀 바꿔 주세요."
"지금 점심시간이라서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전화를 주시겠습니까?"
임 신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빙그레 웃었다.

결국 최민식의 사진집은 국내에서 판매할 수 없어서 외국에서 한국어판으로 팔려 나갔다. 그뿐 아니라 판화가 이철수의 <응달에 피는 꽃> 역시 미술서적으로는 최초로 판매금지에 걸린 책이었다. 문화공보부 장관은 칠곡군수를 통해 분도출판사로 판매 금지 종용 공문을 끊임없이 보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1960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쓰던 중고 하이델베르크 인쇄기 2대를 인수해 인쇄소를 설립했다. 1962년 5월 7일에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문화공보부에 등록했다.

권정생 "종교도 예술도 운동도 가난하지 않고는 말짱 거짓거리"

1979년 임인덕 신부가 독일에서 바우어 16㎜ 포터블 영사기를 들여오면서 경북 안동에서 매달 한번 씩 '열린 영상'이라는 영화 모임을 열었는데, 여기서 임 신부가 만난 사람이 권정생이다. 좀처럼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권정생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안동 시내에 나와서 영화를 보았으며, 임인덕 신부가 왜관으로 돌아가는 밤길에 권정생을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인연으로 분도출판사는 권정생의 작품인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와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발간했다. 권정생은 한때 일직면 조탑동 마을 예배당 종지기로 살았다.

권정생은 어차피 임인덕 신부와 통할 수밖에 없었다. 권정생은 최근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된 산문집 <빌뱅이 언덕>에서 "내가 쓰는 동화는 그냥 '이야기'라 했으면 싶다. 서러운 사람에겐 남이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를 들으면 한결 위안이 된다. 그것은 조그만 희망으로까지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가난은 피하고 싶은 삶의 조건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도 가난한 삶에서 시작되고, 종교도 예술도 운동도 가난하지 않고는 말짱 거짓거리밖에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빌뱅이 언덕은 권정생의 두 칸짜리 오두막이 있는 외로운 언덕이다.

권정생은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며 본래의 가난으로 돌아가 행복하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하찮고 더러운 강아지똥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민들레꽃을 이야기로 지었고, 정호경 신부의 삶을 다룬 <비나리 달이네집>과 <몽실언니>를 쓸 수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의 이야기는 언제나 눈물겹다.  

   
▲ 1979년 왜관 수도원에서 분도출판사와 인쇄소, 시청각실(현 베네딕도 미디어) 직원들이 피정 후 찍은 단체 사진.

 

'빛이 있는 동안에' 일을 할 수 있다

   
▲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
그러나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의 삶에서, 그리고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도출판사를 통해 그가 펴낸 책들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동지로 피붙이처럼 일했던 김윤주, 정한교 편집장의 헌신이 뒤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김윤주 편집장은 1962년부터 1977년까지 재직했으며, 퇴임 후 1994년까지 편집고문으로 봉사하다가 1995년 암으로 선종했다. 김윤주는 순심학교 교사로 일하다 출판사 일을 맡게 되었는데, 독학으로 독일어를 깨쳐 번역에 주력했다. 그는 정확한 단어를 문장에 철두철미하게 구사하고자 조력한 문필가 편집장이었다.

정한교는 1978년부터 임인덕 신부와 동반했는데, 광주대건신학교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한때 <전망>지를 편집하고, 경상대 교양학부 강사로 일하다 분도출판사로 왔다. 2001년 정년퇴직 이후에도 편집고문으로 일하다 2004년 2월 뇌출혈로 선종했다. 그는 재임 중 630여 종의 책을 만들었고, <선민과 만민>, <하나인 믿음>,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나자렛 예수> 등 30여 종의 신학서를 빼어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임 신부는 이 든든한 조력자들을 먼저 하느님께 돌려보내 드려야 했다.

1972년 분도출판사 사장으로 취임한 임인덕 신부는 처음 한 해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다만 어떤 책을 낼 것인가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낸 임 신부의 첫 번째 책은 여류 경제학자 바바라 워드 여사가 쓴 <성난 70년대>였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을 맨 먼저 제기한 바바라 워드는 선구적인 환경학자였다. 100쪽밖에 안 되는 책자였고, 유신 정권이 '잘 살게 해주겠다'며 건설의 망치질을 방방곡곡에서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 문제는 때이른 것이었으나, 인류 미래를 위해 절실한 요청이라고 임인덕 신부는 생각했다.

바바라 워드는 <성난 70년대>에서 "차가운 무관심을 거쳐 파멸로 옮아가고 있는 현 세계의 추세를 역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며 "그러나 크리스천은 징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징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크리스천이 현세의 부와 힘과 기술이 죽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쓰이도록 표징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우리를 아끼시는 하느님의 선의'를 믿고, '빛이 있는 동안에' 일을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후 출간된 <핵 산업의 약속과 허구성>(1981), <공업사회의 붕괴>(1987)등이 이런 맥락에서 출간된 책이다.

'현실에 도전하는' 분도출판사, 천주교중앙협의회와 거래 끊겨
사장이 직접 발로 뛰는 영업.. 대학가에 호평

   
▲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분도출판사
임인덕 신부가 두 번째로 펴낸 책은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1973)였다. 1969년 독일에서 발간된 후 1972년 영문판으로 나오고 불과 1년 만에 한글판이 나왔다. 영문판 제목 'Radical Bible'(급진적 성경)이 가리키는 대로 본문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모두 사회 정의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진 포켓판이었다. 성경과 교회문헌을 현실에 비추어 본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는 한 달 만에 초판 1만 부가 팔려나간 '그리스도인 필독의 생활지침서'였다. 단돈 130원이던 이 책은 특히 유신 정권 치하에서 감옥에 갇힌 시국사범들의 애독서가 되었고, 원주교구에서는 지학순 주교의 명으로 급속히 신자들에게 보급되었다.

유신독재 정권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분도출판사의 책은 금세 교회 밖으로 퍼져 나갔다. 독자에게 샘물 같던 분도출판사의 책들이 정권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시작한 것은 브라질의 마틴 루터 킹이라 불리던 헬더 카마라 대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1973)가 출간되면서였다. 이 책을 내면서 임인덕 신부는 원주의 지학순 주교를 떠올렸다.

"현실 생활이 종교적 진리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거나 신앙 자체에도 배치될수록, 아마 당신은 더욱더 깊이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를 위해 갖가지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으나 교회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임인덕 신부는 "교회에서 이런 책을 만들지 않으면 누가 만들겠습니까?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신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강론 때마다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하고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으나, 책을 유통해 주던 천주교중앙협의회 측은 "교회 안의 생각이 다 신부님과 같지 않다"면서 "앞으로 책을 낼 때 우리와 상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임 신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교회는 문제 있는 책에 대한 판매를 중단할 뿐 아니라, 그동안 분도출판사에 맡겨 오던 전례집과 미사경본 등의 인쇄도 전면 중단하겠다고 알려왔다. 거래를 끊겠다는 말이었다. 모든 출판물 판매를 의지하고 있던 천주교중앙협의회와 거래가 중단되면서, 임인덕 신부는 직접 성당과 대학가 주변의 서점을 돌아다니며 직접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분도출판사를 세상에 알린 책, <해방신학>

   
▲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분도출판사
임인덕 신부에게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두봉 주교는 모두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임 신부는 자신의 작업이 분명 한국의 민주화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었다.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을 보며 모두가 하나의 정신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한팀이 되어 싸우는 기분이었다." 이런 임 신부가 197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다녀와 결정한 것이 페루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의 번역 출간이었다.

성염 교수가 번역한 <해방신학>이 1977년 번역 출간되자 보수성향의 사제들이 드러내고 반대를 표명했다. 교회 출판 허가도 대구대교구가 아닌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받았다.

문제는 문화공보부였다. 담당자는 납본을 보고 '공산주의 성향의 책'이라며 전부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임인덕 신부는 문화공보부를 다녀와서 곧바로 초판 3천 권을 다락방에 숨겼다. 그런데 책을 뒤지러 오는 사람은 없고,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대학생 필독서가 된 것이다. 초판이 팔리는데 1년이 채 안 걸렸으며, 재쇄를 찍어야 했는데, '재쇄'라고 박을 수 없어서 '초판' 일자 그대로 찍었다. 그렇게 매번 3천 권씩 초판본을 14번이나 찍었다. <해방신학>은 책 내용도 책 가격도 그대로인 영원한 초판본이었다.

이후로도 분도출판사는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의 영성>, 레오나르도 보프의 <해방하는 복음>과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등을 출간하고 정호경 신부가 쓰고 농민교리서 편찬위원회 이름으로 나온 <해방하시는 하느님> 등을 펴냈다.

"놀랄 것도 위협적일 것도 없는 책들이다. 그저 '주리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우리의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책들이다. 무슨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거나 세속정치를 엮어내자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과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서로 간에 사랑을 북돋으며 참된 의미에서의 인간해방,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그 해방을 실현'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시절 '나랏일을 보시는 분'들은 왜 그리 발끈했는지 돌이켜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한국 교회에 선물처럼 주어진 신학 번역서..
분도출판사를 전폭 지원한 한스 큉과 오르비스 출판사

임인덕 신부는 <해방신학> 사건 이후로 형사가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지만, 교회 안에서도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출판을 많이 감행했다. 독일 튀빙겐 대학의 한스 큉은 번역서에 대한 인세도 사양하고, 급진적인 신학서적을 내는 미국 뉴욕의 오르비스 출판사도 인세 없이 번역서 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임인덕 신부는 김지하의 <검은 산 하얀방>, <밥> 등의 책을 출간했으며, <꽃들에게 희망>,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의 '분도 우화'를 통해 엄혹한 시절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이참에 이해인 수녀의 <내 혼에 불을 놓아>(1979)를 출간하면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인덕 신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돈이 되지 않는' 신학 학술서였다.

언제부터인가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신학생들은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루돌프 오토, E. 스힐레벡스, 게르하르트 로핑크, 요아킴 예레미아스, 발터 니그, 칼 라너, 피츠 마이어, 요셉 라칭거, 테야르 드 샤르댕 같은 이름을 접했다. 그래서 출간된 책들이 '신학총서', '사목총서', '아시아신학총서', '종교학총서', '교부문헌총서' 등이다. 이러한 총서류의 책들은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평신도신학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각 교구 청년들은 사제 지망 신학생이 아니더라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일부 청년연구자들이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를 만들고, 이윽고 '우리신학연구소'를 만드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 한국에서 살아온 지난 46년 동안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참 좋으신 분'이라고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자신을 '나쁜' 수도자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중반 <해방신학>을 내면서 출판 허가 건으로 관할교구인 대구대교구와 갈등을 빚을 때는 진짜 '나쁜' 수도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출판과 미디어 사목을 하면서 교회의 보수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수도자로서 당연한 순명과 복종의 원칙에 어긋난 행동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인덕 신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굳이 어느 편이냐고 물으면 '하느님 편'이라고 답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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