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답동성당, 빛과 구조의 미학

이산저산구름 2013. 3. 19. 09:30



초창기 한국 교회건축의 탄생-답동성당

사적 제287호로 지정된 인천 답동성당(옛이름: 제물포 성당)은 1889년 7월 1일 세워졌다. 초대 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Wilhelm, J. 신부가 부임하면서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성당을 봉헌하고자 토지매입에 첫발을 내디뎠다. 제물포(당시 인천의 지명)는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서울의 관문으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교구장 블랑Blanc, J.M.G. 주교는 프랑스 몽따르노 출신인 코스트Cost, E.J.G.신부를 파견시켜 성당 건립을 서두르도록 했다. 이후 답동성당은 코스트 신부의 설계 로 고딕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고, 제3대 마라발서 요셉, Maraval, J. 신부 재임시기인 1897년 7월에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G.C.M.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성당의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와 과반수의 신자가 족히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들어차 매우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외관의 종탑 위에는 아직 종은 없었으나 매우 우아한 작은 뾰족탑이 있었다. 1900년 초, 종을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주문하여 들여왔고, 종각이 세워지고 3개의 종이 인천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답동성당보다 앞서 약현성당(서울, 1892년)과 명동성당(서울, 1898년, 답동성당보다 먼저 기공하였으나 1년 늦게 완공)은 전형적인 바실리카basilica 구조의 교회로 중앙에 중랑을 두고 양쪽에 통로를 배치한 고딕양식으로 세워졌다. 고딕건축은 첨두아치Pointed arch와 플라잉 버트레스 그리고 늑재 교차궁륭 등 특징적 요소로 아름다운 공간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고딕건축은 한국 교회건축의 모범이 되어 이후 답동성당을 비롯해 고산 되재성당(1894년), 대구 계산동 옛 성당(1898년), 전북 화산(현 나바위)성당(1906년),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1907년)등이 지어졌다. 답동성당은 1933년에 1,500여 명에 달하는 신자수의 증가로 성당 증축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제4대 드뇌Deneux, E. 신부는 1935년에 증축계획을 세웠다. 1897년에 완공된 옛 모습을 그대로 남긴 채 파리외방전교회의 시잘레Chizallet 신부의 설계에 따라서 성당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어려운 개축작업을 시작하였고, 건물은 1937년 준공을 보게 되었다. 신축된 성당은 고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37년 6월 30일 서울교구 원 라리보Larribeau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이렇게 초창기 한국 교회건축 가운데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 탄생한다.



건축미의 절정-3개의 종탑

성당의 기본 형태는 십자가형 바실리카로 3개의 정문이 있는 중앙 파사드가 위치한 서쪽에서 제단 방향인 동쪽으로 향한다. 성당 내부는 아치가 있는 기둥 열에 의해 중랑과 두 개의 측랑으로 나뉘고, 서쪽 파사드의 3개의 문은 각각 성당 공간 내부의 구획을 반영한다. 즉 중앙 정문은 높은 중랑이, 중앙 정문보다 크기가 작은 두 개의 정문은 좌우 측랑들 앞에 대체로 자리한다. 또한 성당 파사드는 3개의 종탑에 의해 강조되고, 중앙정문 윗부분에는 장미 창이 있다.

답동성당의 파사드의 3개의 종탑은 성당의 건축미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장식이다. 중앙 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은 8개의 작은 돌기둥으로 종 끄트머리가 양파 모양을 한 8각형의 돔을 떠받들고 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웅장미와 안정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성당의 경사진 지붕의 양끝에는 각각 작은 8각형의 탑이 우뚝솟은 중앙 종탑과 균형미를 이룬다. 또한 돌과 벽돌을 섞어 지은 답동성당의 주된 재료는 적벽돌을 썼지만 건축미를 살리기 위해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을 사용했다. 벽감 모양의 아치 형태의 성당 출입구와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 그리고 처마 밑 돌림띠는 화강석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당의 파사드는 적벽돌과 화강석이 어우러져 중후하면서도 화려함을 자아낸다. 비록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낮 12시와 저녁 6시에 울리던 3개의 종은 현재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탑의 조형미와 상징성은 여전하다.

숫자‘8’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종탑을 8각형태로 만들어 로마네스크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사항은 동서의 축선에 따른 성당의 공간배치이다. 왜 성당의 제단 부분을 동쪽에 두었는가? 그 이유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동쪽 하늘로부터 오신 하느님의 존엄함을 숭배하기 위해 머리를 돌려야 하고, 지상의 낙원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예언자 즈가리아는 그리스도를 지상의 빛이라고 하면서 동방이라 불렀고, 히브리의 예언자 다니엘은 그리스도가 동방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하고, 마태오는 복음서에서 마지막 끝날에 그리스도는 동쪽에서 오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제단 부분은 성당 제의의 중심점이기 때문에 성당건축은 언제나 제단부분부터 시작되었다. 중세 사람들이 성당을 지상에서 예시하고 있는‘천상의 예루살렘’이며, 신자들이 종교적인 깨우침을 찾는 곳과 천상의 신비함이 도래한 곳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신자들은 성당에서 지상의 삶으로부터 초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빛의 공간미-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

답동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화려한 색채의 창문 유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유리화는 1979년 본당 설정 9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제단 뒷부분과 성당 내부 좌우 창문에 제작되었다. 유리화는 기하학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장식 모양(15점의 장미 문양, 제단 뒷부분)과 성경주제(8점의 구약의 창세기와 8점의 신약의 그리스도 이야기, 좌우 창문)가 그려져 있다. 화려한 유리창은 고딕양식 성당 건축에서 절대적인 새로움이다. 유리창을 통한 ‘빛의 신비주의’는 성당 내부 전체 공간에 작용한다. 다채로운 유리창은 성당의 고귀한 요소일 뿐 아니라, 안으로 비쳐드는 빛을 통하여 성당은 천국에 가까운 이상적 모델, 즉‘천상의 예루살렘’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가진다. 중세 사람들은 빛은 신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빛의 신비는 이미 내부로 들어오기 전 성당 입구위에 장미창이라고 불리는 태양을 닮은 원형창에서 출발한다. 이 장미창에서 태양은 그리스도를, 장미는 성모마리아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당 내부의 유리창과는 달리 빛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장미창은 거대한 태양처럼 빛나면서 외부의 빛을 변화시켜 성당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와 더불어 성당 내부의 유리창들은 빛의 벽으로 변화되어 빛으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 빛은 육중한 돌로 구성된 모든 구조물의 구석구석에 닿아 단단한 물질을 마치 하늘거리는 레이스 천과 같이 시각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빛은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도 비춰준다. 또한, 유리창은 대단히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그려진 그림의 내용으로 신자들을 교육하는 것에도 목적이 있다.

그래서 중세 신학에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거룩한 교사로 비유되었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영원한 진실의 태양’과 만난 것이다. 이렇게 성당의 내부공간은 심오하게 작열하는 색채의 감동과 빛을 전달하면서 신자들을 다른 세계로 옮겨준다. 마찬가지로 초창기 한국 교회 건축인 답동성당도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의 구조적 미학을 조화롭게 보여주면서 종교적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글. 윤인복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사진. 답동 성바오로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