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 모두 잘 알고 있으시지요? 예수님이 마르타에게 말씀하신 '중요한 하나'는 뭘까요?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합니다. 그 하나를 제대로 할 줄 알면 다른 건 잘 못해도, 잘 몰라도 괜찮아. 하지만 그거 하나를 잘 못하면 다른 걸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당신에게 그 하나는 무엇이냐고요. 그것 하나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내 인생, 괜찮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어렸을 적 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저한테 다섯 살 위 형이 있었는데 매우 똑똑했거든요. 주변 어른들이 저놈이 커서 뭔가 될 거야 했지요.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어요. 집안의 모든 신망과 기대는 형에게 갔지요. 저도 중간쯤은 했는데 늘 형에게 밀렸어요. 다른 데 가면 괜찮은데 집에만 가면 기가 죽곤 했죠. 심부름도 대부분 형에게 시키셨어요. 형은 심부름을 하고 노는 스타일이었는데 저는 심부름을 하는 도중에 놀았어요. 심부름 안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어린 마음은 그렇지 않거든요.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은 부모가 나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니까요. 형한테 시킬 때 ‘저 정도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어요. 서운했지요.
아주 추운 날이었어요. 아버지께서 형이 있는데도 나를 불러서 "학교 가기 전에 군청에 좀 들러야겠다"라고 하셨서요. 이게 왠일인가 싶었죠. 형이 아닌 내가 선택 받다니 말입니다. 너무 신나고 기뻐서 추위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3킬로미터 거리 되는 군청까지 신나게 뛰어갔지요. 그런데 도착하고 나니 오긴 왔는데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군청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두 바퀴 돌고 집에 갔어요. 갔더니 식구들은 밥 다 먹고 형은 학교 가고 없었어요. 아버지가 "심부름 보내려고 했는데 너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군청 갔다 왔다"고 했더니 기가 막혀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결근계를 써서 전달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결근계를 써 와서 보니 애가 없는 거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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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주 목사가 지금여기 피정에서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
우리 모두에게는 하느님과 통할 수 있는 '핫라인'이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명(命)을 받고 왔습니다. 명, 목숨 줄이죠. "예!" 대답하고 온 거예요. 그런데 왜 왔어요? 도대체 뭐하러 온 건가요? 그것을 아는 사람은 무조건 행복한 사람입니다. 평생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것을 아는 것,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예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를 아셨어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그러나 너희는 모른다"라고 하셨죠. "나는 내 마음대로 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나는 알지만 너희는 모른다"라는 것은 "그러니 너희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이런 말씀일까요?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안 것처럼 너희도 알 수 있다. 이런 말씀이지요. 절망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처럼, 나처럼, 너도 알 수 있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알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으면 전화해서 아버지한테 물어봤을 거예요. "아버지, 저 군청에 왜 보내신 거예요?" 하고 말이죠. 그럼 아버지께서 얘기해 주셨을 거예요. 그럼 나는 그냥 느티나무를 돌다가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심부름을 완수했을 거예요.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신 전화기가 있죠. 왜 안 씁니까? 왜 귀를 기울여서 그 채널을 맞추고 듣지 않습니까? 언제든지 쓸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번 써 보세요. 그러면 일러 주십니다. 묻지 않으니 대답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왔구나, 이걸 하러 왔구나, 그런 것을 묻고, 찾고, 그걸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과 통할 수 있는 선이 있어요. 핫라인이 활짝 열려 있는 거죠. 다른 사람의 라인 빌려다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과 내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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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기자 |
기도한 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년 전에, 멕시코에 가서 일하는 과학자인데 신앙이 깊은 분을 한번 만났어요.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한평생 사는 게 시험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점수에 따라 좋은 곳으로도 가고 안 좋은 곳으로도 가고 그런다." 인생이 시험이라는 것은 이해가 됐어요. 학교에서 시험 칠 때 보면 어떤 것은 2점짜리, 어떤 것은 10점짜리 문제가 있죠? 10점짜리 하나 맞추는 게 1점짜리 10개 맞추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그래서 그런 10점짜리 문제 없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있다고 하는데 바로 "무슨 일을 할 때 얼마나 하느님과 함께하는가" 이 문제라는 거예요. 하느님과 의논하면서, 하느님께 합당한 방법으로 했는가.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중요하지요.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이다." 그 얘기가 뭘까요? 왜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고 다른 사람은 아닐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생각, 내 판단, 내 주장으로 하는가', 아니면 '나를 비우고 하느님 뜻에 부합하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교 시절, 고향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답니다.
"아무개야, 기도를 그렇게 오래, 길게 할 것 없다. 한마디만 하면 족하다.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네가 장차 더없이 높은 분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하느님의 영이 너에게 임하실 것이다'라고 하자 바로 '저는 미천한 하느님의 종입니다. 저를 통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한 바로 그것이다."
그것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 기도도 그렇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기도지요. 그런 기도, 하느님께서 정말 반갑게 받으실 거예요. "내가 너를 쓴다. 너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 좀 해야겠다." 이렇게 말이지요. 데레사 수녀가 어린 수녀들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네 손 말고 다른 손이 없다. 그리스도는 네 발 말로 다른 발이 없다." 따라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이지요. "기꺼이 저를 쓰십시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기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하고 '그대로' 했다는 거예요.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잘 익은 사과에도, 악취 나는 도랑에도 똑같이 햇빛 비추신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 집안도 보고, 학식이 얼마나 있는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사랑하시지요. 제가 어느 날 아침에 산책을 가는데 사과 과수원 옆을 지나갔어요. 추수가 끝나서 사과가 없는데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하나 남아 있었지요. 햇빛이 그 빨갛고 아름다운 사과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악취 나는 도랑이 흘렀거든요. 거기도 똑같이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거예요. 그 예쁜 사과와 도랑에도 똑같이 햇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예요. 햇빛 같은 존재죠. 사랑 말고는 다른 것을 할 줄 모르세요. 그 사랑을 여러분도, 저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면 불평 불만이 잘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 수 있어요.
그분이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건 우리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먼저 가셨기 때문이에요. 그분이 우리에게 뭘 하라고 하는 것은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에이, 못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건 성령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생각이죠. "네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단 말이냐?" "성경책 한 번도 안 읽은 네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똑같이 받는단 말이냐" 이런 건 모두 사탄의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 옆에서 같이 죽어 가던 강도가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거두절미하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분이에요. 지금 여기 내 마음의 중심, 그것 하나면 됩니다. 하느님 품을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이현주 목사와의 즉문즉설 |
문 :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존재하실까요?
이현주 :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요. 다 자기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금강산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려면 하늘에 올라가야 하죠. 금강산 기슭에서는 금강산이 안 보이니까요. 그래서 우린 볼 수가 없어요. 하느님 안에 있으니까요. 하느님 밖으로 나가야 볼 수 있는데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나 느낄 수는 있어요. 존재를 느낄 수 있어요. "알긴 아는데 설명할 수 없어." 그게 진짜 아는 거예요.
아까 저를 소개하면서 한상봉 편집국장님이 "이현주 목사님 아시죠?" 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를 알아요? 제가 무슨 일을 했다, 제 이름이 뭐다, 이런 것으로 저를 알 수는 없어요.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거든요. 레시피로 국 맛을 알 수 없어요. 먹어 봐야 알죠. 그런데 먹고 나서 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다"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 대학자, 신학자로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이지요.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그분의 모든 생이었어요. 이 천재 교수가 평생 연구한 결과가 뭐였는지 아세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시다"였어요.
하느님은 우리 머리로 알 수 없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생의 후반부에 말도 하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다고 해요. 하느님을 안 것이지요. 비서가 글을 쓰시라고 하니 "내가 그동안 쓴 것은 지푸라기일세"라고 말했대요. 그게 진짜 아는 거예요.
문 : 목사님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고,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현주 : 어떻게 뭘 해야 할지 캄캄한 시절이 저한테도 있었는데요. 극복한 적 없어요. 그것을 이겨낼 만한 능력이 나에게 없었거든요.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극복한 것은 아닐까요? 내 힘으로 넘어선 것은 아니에요. 궁지에 몰려 있었을 때, 앞이 안 보였을 때가 몇 번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가 나에게는 인생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는 때였어요. 막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열리는 것이었지요.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었어요. 은총으로 주어져요. 열린 문도 은총이지만 막힌 문도 은총이에요.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분도 주님이시고 나를 건져 주신 분도 그분이시지요.
문 :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보는 나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이현주 : 그건 선택해야 하는데, 사실 남이 보는 나, 세상이 보는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는 생각 안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는 문화에서 자라서 살고 싶은 대로 못 삽니다. 빨리 벗어나야 해요. '난 나 중심에서 그분의 말씀만 귀기울여 듣고 세상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훨씬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요.
문 : 목사님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나요?
이현주 : 궁금하시면 답은 해드리는데 참고 정도만 하셨으면 해요. 답은 누구나 다르고 답을 찾는 과정도 다 다르니까요. 제 이야기는 개인적인 이야기지요. 저는 이 세상에 사랑이 무엇인지 공부하러 온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것을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 : 전 종교인으로 살고 싶고 결혼 생활도 잘 하고 싶어요. 종교인으로 살려면 결혼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현주 : 얼마 전에 한 신부님의 책을 읽었어요. 신부님은 기도하기를 "하느님, 저는 왜 세상에 왔습니까?" 하니 하느님께서 "나는 네가 신부가 되길 바란다"라고 하셨대요. 그러나 자신은 여자가 좋고 아이는 더 좋았다는 거예요. "저는 결혼을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신부가 되라"고 답을 주셨대요. 마침내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제가 됐습니다. "애들하고 사는 꿈을 접어야겠다" 하고 신부가 된 거죠.
그런데 첫 발령을 학교로 받았대요. 아이들이 너무너무 많은. "나는 기껏해야 3~4명의 아이를 생각했는데 더 많은 아이들을 주셨다"라고 쓰셨더라고요. 결혼의 유무과 상관없이, 끝없이 나를 세상에 왜 보내셨는가를 물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럼 분명하게 일러 주실 거예요. 대신 묻고 또 물으세요. 묻고 바로 포기하는게 아니라. 결혼해서 사는 것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또 좋은 거예요. 분명히.
문 : 처음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 때는 좋은 일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요?
이현주 : 종교에서 교주가 무시 당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운명이에요.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죠.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이 외로워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외롭죠.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진짜 주님으로 모시고 살자.'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성직자나 평신도나 다 비슷해요.
문 : 영적인 갈증이 있어요.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돌아서면 가슴이 너무 허하고. 영적인 갈증이 있으셨는지, 그럴 때 해소법을 알고 싶어요.
이현주 : 갈증, 목마르다는 거죠. 목마를 때 어떻게 목을 축이느냐.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과 내 안에 샘이 있어서 퐁퐁 솟아나는 것. 그런데 말이지요. 당신 안에 시원하게 해줄 샘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지요.
헨리 나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웃과 막힌 것을 허무는 길은 하느님과의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담이 허물어지면 이웃과의 담도 허물어진다. 내가 하느님과 멀어질수록 이웃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이웃과의 문제를 그 이웃과 풀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풀어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목이 마르다면 하느님의 샘물에서 목을 축이세요.
문 : 집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을 기억해요. 기도를 배우라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이냐시오 수련도 했는데 요즘에는 향심기도를 해야 하나, 뭘 배워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현주 : 제가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주님, 제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는 내가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이 나를 기도하게 하시니 하는 거지요. 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잘 안 주십니다. 중심에 계신 하느님께 집중하라는 이야기는 바깥에 있는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거예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특색이 있죠. 목마름의 종류가 달라요. 내 이야기만 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기도를 하세요. 침묵할 줄 알아야 하죠. 잠잠해야 하느님을 알 수 있어요.
기도 방법은 많은데 사실 기도를 안 하는 게 문제죠. 하나를 해서 끝까지 하는 것이 좋아요. 이것저것 하면서 나에게 맞는 것을 만나면 그것을 잡고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들어가세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오직 한 분 선생 가르침대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