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이어온 바람으로 마음을 씻는 길
개심사까지 오르는 길은 낮은 돌계단의 산길이다.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난 나무와 계곡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 같다.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통사찰 개심사는 654년(의자왕 14) 혜감慧鑑이 창건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천년을
이어온 길이다. 천년을 이어온 바람이며 숲길이며 돌계단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길에 차이는 돌부리 하나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개심사로 향하는 길은 바쁘지 않다. 돌계단이 펼쳐진 정다운 길. 좋은 사람과 손을 잡고 두런두런 걸어도 좋을 길이다. 가는 동안에는
병풍처럼 둘러선 소나무, 맑은 기운이 서린 연못, 완만해서 편안한 계곡 등을 두루 만난다. 계단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졸졸졸, 심심치 않게
따라온다. 마치 길동무를 해주는 느낌이랄까? 해탈문을 들기 전 만나는 외나무다리가 신기해 잠깐 멈춘다. 직사각형 연못을 가로질러 큰 통나무를 턱
걸쳐놓은 폼이 멋스럽다.
이 다리는 개심사가 유명해지는데 한몫을 하는 볼거리. 다시 길을 재촉하니 저 멀리서 안양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스르는 것 없이
안양루에 걸린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은 이응노 화백의 스승이자 근대 명필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어찌 보면 초등학생이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모난데 하나 없이 둥그스름한 글씨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괜히 푸근해진다. 또 하나 개심사에 푸근한 이미지를
더하는 것은 기둥들이다. 굽어 있고 배가 불룩하며 굵기가 저마다 다 다르다. 인간의 마음대로 재고 자르고 깎지 않은 못난이 나무들.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전혀 손질하기 않고 원래 모습대로 가져다 쓴 것 같다. 특히 해탈문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툭 터진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건축양식을 그대로
뽐내
한 건물은 좀 다르다 싶어 보니 그것이 바로 대웅전大雄殿이다. 개심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과 요사채寮舍寨인 심검당尋劍堂(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58호)은 조선 초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의 건축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대웅전은 기단이 백제의 것이고 현존 건물은
1475년(성종 6) 산불로 소실된 것을 1484년(성종 15)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맞배지붕 건물로 차분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
대웅전은 밖에서 보면 기둥 사이로 공포가 놓인 다포계 건물로 보이나 안쪽에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놓인 주심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형태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건축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심검당의 건립연대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1484년(성종 15) 건립된 것으로 본다.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ㄱ’자형의 방으로 늘려 상당히 큰 규모이다. 기단석 위에 자연 주춧돌을 올리고 배흘림이 가미된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기둥
윗부분에서 공포를 짜올려 지붕을 지탱하게 한 주심포 양식이다. 심검당 옆의 부속 건물 역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보기에 더욱
편안하고 푸근하다. 그리 넓지도 않고 너무 크지도 않고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낡은 사찰,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앉은 개심사를 보고 있자니 그
마루에 눌러 앉아 한숨 자고 가고픈 생각이 든다. 굳이 이름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분위기 자체가 편안하고 살가워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굽이굽이 인생사를 닮은 시골길을 따라
얼마 전 서산 9경 중 제 1경으로 선정된 해미읍성이 개심사에서 가깝다 해서 그리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굽이도는 작은 길이 정겹다. 걷기 열풍이 지나고 나서인지 여기저기서 ‘길 내기’가 유행처럼 번졌었다. 이 길도 ‘아라메길’이라는 이름을 한
둘레길인가 보다.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말. 즉 바다와 산을 끼고 도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백암사지百庵寺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1호), 일락사日樂寺, 황락저수지, 해미읍성에 이른다.
해미읍성은 왜구의 침략으로 피해를 당하던 차에 1417년(태종 17) 축조사업을 시작, 1421년(세종 3) 세종에 이르러 완성한
읍성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는데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치성, 성문 앞을 가려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옹성,
무지개 모양의 홍예 남문, 동문과 서문, 성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마셨던 우물 등이 그대로 남았다. 민가도 볼 수 있는데 소박하고 정겨워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해미읍성이 유명한 이유는 또 하나. 천주교도들의 순교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성지순례를 온 듯 한 천주교인들도
눈에 띈다.
주욱 둘러보니 주막이 눈에 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잠시 여장을 풀고 뜨끈한 소머리 국밥으로 속을 데운다. 읍성의
주막에 앉아 있으니 어디선가 옛장터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역사 여행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길을 통해, 문화재를 통해, 바람을 통해 전해 듣는 것. 개심사와 해미읍성은
그렇게 내 귓전에 소곤소곤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국밥 국물을 밑바닥까지 들이키고
있었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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