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아름다운 산천에 깃든 거창 선비들의 자취를 따라 - 여행길 5

이산저산구름 2013. 8. 20. 09:44

 

 

 

 

 

- 수승대
한낱 누구의 소유가 될 물건이 아닌 아름다움

 

수승대(搜勝臺, 명승 제53호)는 물과 숲과 바위의 어울림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물이다. 예부터 양반과 선비들은 풍광 좋은 계곡이나 기암절벽에 정자를 세웠다. 그들은 지역에서 구심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라 정치·문학·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는 정자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선 선비들은 여기를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용추폭포가 있는 심진동과 농월정·동호정 등이 있는 화림동과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을 일러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깊고 길고 큰 계곡과 주변 산림이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낮에도 서늘한 그늘을 만든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했다.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수승대'는 1543년 이곳 마리면 영송마을 처가에 설을 쇠러 왔던 퇴계 이황(1501~1571)이 지은 이름이다.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1500~1584)의 화답시가 유명하고 요수 신권(1501~1573)의 관련 시도 있다.
수승대의 아름다움에 취해 바위에 새긴 이들의 시는 뒷날 긴 세월 동안 임씨와 신씨 가문의 부질없는 탐욕으로 얼룩진다. 신씨 문중은 거북바위에 '樂水藏修之臺(요수장수지대)'라 새겼고 임씨 문중은 '葛川杖之所(갈천장구지소)'라 새겼다. 뿐만 아니라 이 두 가문은 후손의 벼슬에 따라 수승대의 소유권을 두고 낯 뜨겁게 다투었다.
구한말 3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건창(1852~1898)은 수승대를 돌아본 뒤 <수승대기>에 썼다. "수승대는
시냇물 가운데 있는 한갓 바위일 뿐이니 누구 소유가 될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소송이 있겠는가.이곳의 아름다움은 빼어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하다."
수승대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이들의 글씨가 가득하다. 옛말에 좋은 물건은 손을 타서 더러워지기 쉽다 했다. 시내 가운데 바위 하나를 두고 그토록 싸움을 그치지 않았던 두 가문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을 만하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수승대는 인간의 탐욕과 비루함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수승대가 인간의 욕심 앞에 또 어떤 수난을 겪게 되진 않을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까닭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 요수정과 관수루
학문에 정진하며 고향에서 안분낙도한 신권의 뜻

 

 

시내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는 요수정(樂水亭,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3호)과 구연서원(龜淵書院) 관수루(觀水樓,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2호)가 있다. 구연서원 뜰에는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가 있는데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이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로 요수(樂水) 신권이 학덕을 쌓으며 노닐던 곳이다.

 

 

여기서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을 바라봤을 텐데 계단을 따로 내지 않아 왼편 바위를 타야 올라갈 수 있다. 서원 안쪽으로는 가문의 위상을 내세우는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건너편 요수정 또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고향에서 안분낙도한 신권과 관련이 있다.
물(水)은 학문의 표상이다. 모르는 사이에 사람과 세상을 적신다. 또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면서 위로 올라온다. 사람의 배움과 그 실천궁행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뜻이 '관수'와 '요수'에 담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