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연서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기려


예연서원(禮淵書院,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1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를 기리는 서원이다. 이름난 서원은 아니지만 동네 높지막한 데 자리잡은 품이 매우 넉넉하고 여유롭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곽재우는 의령·합천·창녕 등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곽재우의 당숙인 존재(存齋) 곽준(1551∼1597)의 위패도 추가로 모시고 있는데,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안음현감이 되어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黃石山城, 사적 제322호)을 지키다 함락되자 가족과 함께 전사한 인물이다. 곽준의 일대기를 다룬 <존재선생실기(存齋先生實記)>는 숙종 21년(1695년)에 편찬됐고, 영조 42년(1766년)에 판각된 책판(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은 예연서원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서 경상도지역 인물들의 활동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다. 숙종 3년(1677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예연'이란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년)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가 1977년과 1984년 복원하였다. 사당·강당과 제물을 준비해 두는 고사(庫舍), 숙소로 쓰는 동·서재 등이 있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과 교육에 쓰던 건물로 중앙에 마루 양 옆에 온돌방을 뒀다. 마을 들머리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홍의장군 신도비(1691년 건립)와 충렬공 곽준의 신도비가 나란히 있다.
- 도동서원 기와를 활용해 쌓은 아름다운 맞담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 사적 제488호)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했고 '동방오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을 모시는 서원이다. 1678년(숙종 4년)에 한강(寒岡) 정구(1543∼1620)를 추가 배향했다.

1605년 지금 자리에 들어서 보로동서원이라 했는데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그러면서 동네도 이름이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다. 1871년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당시 철폐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서원은 향사 기능과 강학 기능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구성이 달라지는데 어쩌다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는 경우는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사람들 가르치는 강당 앞에 배치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도동서원 역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배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동서원 앞에는 4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대부분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데서 비롯됐다. 은행나무는 사액 기념으로 정구가 심었다.

사당(祠堂), 학문 강론장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머물던 기거하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가 있고, 입구에서부터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이 갖추어져 있다.

사당 둘레는 반드시 담으로 둘러싸고 정면 중심에 묘문(또는 신문)을 설치한다. 묘문은 대부분 삼문이나 일각문으로 만든다. 담으로 둘러싸게 되면 공간의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행사를 치를 때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다. 도동서원의 '강당사당부장원(講堂祠堂附墻垣, 보물 제350호)'은 강당·사당,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담장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담장은 기와를 활용해 쌓은 맞담으로 매우 아름답다. 돌을 쌓아 암키와를 줄맞추어 얹고 진흙을 다져 올린 다음 중간마다 연화문 수막새를 어긋나게 끼워 넣었다. 자연미를 최대한 살렸으며 높낮이를 달리해 공간에 변화를 주고 있다. 서원 건축물의 가치는 시대상과 역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동북아시아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서원 건축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데가 없다. 그 가운데서도 고종 때 훼철을 면한 47개 서원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도동서원은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건물이다.
- 묵계서원 청렴결백했던 선비 옥고와 김계행 기려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阮,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호)은 응계 옥고(1382∼1436)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숙종 13년(1687년)에 지었으나, 서원 철폐령을 받아 고종 6년(1869년)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됐다.
서원은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강학 기능은 관두고 향사 기능만 복원하는 경향을 띤다. 묵계서원도 바로 그런 서원이다. 하기야, 지금은 서원에서 공부할 학생이 있지 않으니 강학 공간을 마련한다 해도 별로 쓰일 일이 없기는 하겠다. 옥고와 김계행은 둘 다 관리로 지낼 때 청백리로 이름 높았다고 한다. 묵계서원과 함께 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는 안동김씨 묵계 종택은 마을 한가운데 있다. 안에는 제사를 모시는 제청으로 사용되는 보백당(寶白堂)이 있다. 김계행은 조선 전기 안동 출신 문신으로 굳은 의지와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經學)에 힘썼는데, 성리(性理) 문제에 깊이 들어가 이치를 깊이 깨달은 인물이다. 묵계 종택 앞에 서 있는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