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조선 사림문화의 꽃, 서원을 찾아 - 여행길 4

이산저산구름 2013. 8. 19. 10:27

 

 

 

 

- 도산서원
검소·간략·소박함 속에 퇴계의 선비정신 구현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은 선조 8년(1575년)에 사액을 받아 영남 유학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존속하였다.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퇴계 이황(1501∼1570)이 머물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도산서당과 퇴계 사후 추모하기 위해 세운사당을 포함하고 있다.
퇴계 이황은 누가 뭐라 해도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다. 그 가운데서도 주자의 학문을 한데 모아 세운 인물이다. 우리나라 유학이 나아갈 바를 새로 세우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과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그의 서책이 왜군에게 약탈돼 넘어갔는데 이로써 일본 유학의 부흥에 큰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과거가 치러졌으며, 노론이 집권한 뒤인 영조 때 사라졌지만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222년 되는 1792년(정조 16년)에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르면서 되살아났다. 도산서원 낙동강 건너편 시사단(試士壇)이 그 유적이다. 1968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로1천원 권의 주인공이 됐다.
명종 16년(1561년)에 건립된 도산서원은 퇴계가 몸소 설계했다고 한다. 민가처럼 간결·검소하게 꾸몄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지어진 사당 영역도 간결하고 검소하다. 후인들이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도산서원과 둘레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 글로 남겼으며 강세황은 1751년 <도산도>를 그려 도산의 풍경을 담아냈다. 이처럼 서원이 들어서는 데 필수요건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다. 앞으로 강이 있고 뒤로는 산이 있어 탁 트여 있을 뿐 아니라 시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정감을 갖췄다. 철 따라 달라지는 산색과 굽이쳐 흐르는 물색에서 생의를 깨닫고 마음을 넓히며 지혜를 담기 위함이란다.

 

 

퇴계 이황을 제사 지내는 공간 일대는 국가공식지정 보물이 됐다. 보물 제211호로, 어렵게 이르는 말로 ‘도산서원 상덕사부 정문 및 사주토병(陶山書院 尙德祠附 正門 및 四周土)이다. 쉽게 풀어 쓰면 이렇다. 도산서원 상덕사와 그에 딸린 정문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흙담장. 덕을 받든다는 이 사당은 축대가 화강암으로 4단을 쌓아올려 엄숙하고 빛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검소하고 간략하다. 엄숙·화려와 검소·간략의 이런 비교·대조 또는 조화·대칭은 그 둘 다를 모두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담장은 원래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1969년 새로 단장하면서 돌로 바뀌었다. 원래 있었던 질박함이 사라졌다고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역사가 아닐까.
이처럼 서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반면 나무를 일부러 심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다. 서원 밖에는 공자 행적에 나오는 행단(杏亶)과 관련된 은행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는데 지금은 대부분 나이를 많이 먹어 커다란 나무가 돼 있다. 이들 나무는 정자나무 역할도 한다.
담장 주위와 서원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많이 심는다. 서원 안쪽 강학 공간에는 은행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 등을 대표적으로 많이 심는다.
제향공간인 사당에 심는 나무로는 배롱나무와 무궁화 아니면 모과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측백나무와 회화나무 등이 있다. 그런데 도산서원에는 유독 매화가 많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매화에 대한 이황의 사랑은 지독했다. 멀리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정인(情人)에 대한 그리움을 매화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안동 도산면 일대를 둘러보면 이황이 얼마나 크고 많이 자취를 남겨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퇴계종택(退溪宗宅,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은 1907년 일본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없어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26∼1929년 후손들이 지금과 같이 번듯하게 새로 들이세웠다. 당시로서는 엄청났을 역사(役事)다. 'ㅁ'자형으로 모두 34칸이며 둘레 풍경에까지 신경을 썼다.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고 거기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현판이 걸려 있다.

 

 

 

-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병풍 같은 푸른 산을 마주하고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서원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겪은 이야기에 후회와 교훈을 담아 남긴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이다. 고려 때부터 사림 교육기관으로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선조 5년(1572년) 류성룡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겼다.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있다.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에도 살아남았던 서원으로 강학 공간인 복례문·만대루·동서재·입교당·장판각, 제향 공간인 신문·존덕사·전사청 등이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면 흐르는 강물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병산서원이라는 유래도 전해진다. 이런 것을 두고 인간과 자연이 마주보는 경관이라고 한다.
도동서원과 도산서원이 가을 달이 찬 물을 비추는(秋月照寒水) 품격이라면 병산서원은 늦은 무렵에 병풍 같은 푸른 산을 마주하는(翠屛晩對), 생기가 가득차 오르는 푸른 산색을 마주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새로 얻어나가는 경지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관이라 하겠다.
여기 만대루에 오르면 한번 드러누워 봐도 좋다. 앉아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이 건물의 뼈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순한 성분은 거의 개입되지 않은 이 건축물은 그 단순함으로 기품 또는 위엄을 내뿜고 있다.

 

 

 

 

조선시대 서원의 역사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1543년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어서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은 1550년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에임금의 사액(賜額)을 요청해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을 내려받는 등 서원 보급에 힘썼다.
조선시대 사화(士禍)가 거듭되면서 낙향한 사림들은 서재·서당·강사·정사 등 교육공간을 마련하고 성리학 발전과 후학양성에 힘쓰게 됐다. 초기 서원은 교육 거점이자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제향처(祭享處)였다.
이에 더해 조선중기 들어서 지역 선비들의 사회활동 역량이 더해져 급기야 18세기에는 전국에 서원이 700곳이 넘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서원은 교육기능보다 향사(享祀)기능이 위주가 되었으며, 면세와 면역특권 남용으로 국가경제를 좀먹는 역기능이 생겨난다. 영조는 즉위 3년째인 1727년부터 300개 남짓 서원을 혁파했으며, 흥선대원군은 고종 5년(1868년)과 8년(1871년) 두 차례에 걸친 서원훼철령으로 전국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에 대해 문을 닫게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날 서원이 문화유산으로서 지니는 가치는 인물과 고건축 분야로 극히 국한되고 있다. 서원이 처음부터 지녔던 교육기능보다 전통제례 또는 유학의 본산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유교문화는 인물과 사상, 철학과 정신, 학문과 가치관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사실 서원의 가치는 거기서 생활하며 삶을 누렸던 사람과 정신에 있지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어쨌거나 서원은 이런저런 성격변화를 거치면서 400년 넘게 존속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 교육기관이다. 서원문화에는 한국 유교문화의 다양한 모습과 함께 공통된 특성까지 집약돼 있다.
경상도 지역에는 서원이 많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 당시 철폐 대상에서 제외된 47곳의 서원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함경도는 1곳, 전라도·강원도는 3곳, 황해도는 4곳, 충청도·평안도는 5곳뿐이었지만 경상도는 4분의1을 훌쩍 웃도는 14곳이 유지되었다. 서울까지 포함돼 있는 경기도조차도 12곳밖에 안 돼 경상도에 으뜸 자리를 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