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옛이야기들 살아 숨쉬는 거창 옛길 - 여행길 6

이산저산구름 2013. 9. 3. 09:11

 

 


길은 시대마다 적용되는 경제학이 달랐다.
전통사회에서는 농지를 소중하게 여겼다. 길은 농사를 짓는 평지를 달리는 일이 없었다. 마을조차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었다. 농지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길은 농지와 산지가 만나지는 데로 났다. 농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덜 불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자락이었다. 산이 가로막을 때면 길은 달라졌다. 꾸불꾸불 흐르지 않고 골짜기와 등날을 최대한 곧게 오르내렸다.
거리를 최소화해 걸리는 시간을 줄인 것이다. 옛길의 경제학이다.
오늘날은 달라졌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내던 때와 해방 이후 신작로 위로 국도를 닦던 시절까지는 옛길의 경제학이 나름 적용됐다. 당시까지는 농지가 대접받았기 때문이겠다. 토목공학 등 길 닦는 기술도 자연 상태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요즘은 기술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 농토에 대한 존중조차 사라졌다. 반면 옮겨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과 에너지를 '물류비용'이라며 중시하는 세상이 됐다. 길에 적용되는 경제학도 완전히 달라졌다. 빠른 속도만을 최선으로 삼는 것이다. 길은 언제 어디서나 직선을 지향하게 됐다. 옛길은 묻히거나 토막이 났고 마을은 도로 너머 어딘가에 있다.
국도 3호선도 다르지 않다.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이어지는 남북 간선도로인 이 국도에는 옛 국도도 있고 새 국도도 있다. 거창 금원산(1353m)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자락에 있는 바래기재는 경남 함양군(안의면)과 거창군(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바, 넘는 방식이 새 국도와 옛 국도는 다르다.
옛 국도 3호선은 이 재를 넘는 옛길을 덮어 썼지만 새 국도 3호선은 이와 무관하게 그 오른쪽에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을 내었다.

 

 

 

- 삼산마을과 바래기재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묵었던 반락원

 

 

바래기재 바로 아래에 함양 안의면 대대리 삼산마을이 있다. '삼산'은 마을을 에워싼 청태산, 월암산, 아미산이다. 바래기재의 바래기는 이 삼산을 마주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됐다. 삼산마을은 조용하다. 그럴 듯한 솔숲이 마을 앞에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으나 사람이 없다.

바래기재에는 반락원(反樂院)이 있었다. 지금은 대신 밥집이 있다. 밥집조차 새 국도가 나면서 찬밥 신세가 됐다. 빠르기의 경제학을 따라 옛길과 옛 국도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래기재로 가려면 함양 안의면까지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일치하는 구간을 따라오다가 새 국도가 옛 국도와 갈라지는 용추교차로에서 옆으로 나와야 한다.
옛날에는 장승도 있었고 사람들이 머무는 원(院)도 있었지만 지금은 휑뎅그렁하다. '반락'은 중국 이태백의 한시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三山半落靑天外)'라는 대목에 따왔다는데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옛날 선비들이 서울 가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는 귀향길에 들러 여기서 먹고 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우기며 탐탁찮다는 뜻으로 반락(反樂)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들조차 이곳을 피해 거창 남상면의 관술령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 쌀다리
병항마을 앞 개울에 놓인 널다리

 

 

바래기재를 넘어 7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망한 주유소가 나타난다. 새 국도 3호선이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겠다. 여기서 200m 가량 나아가면 왼편으로 옛길이 있다. 전형적인 옛길이다. 여기로 650m쯤 들어가면 병항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농촌마을이지만 앞에 놓인 다리는 비범하다. 마을에서 길을 따라 대략 200m 나간 지점의 개울가에 있다. '쌀다리'인데, 중심 받침돌 위에 커다란 돌 두 개를 이어붙인 널다리다.
1758년 오성재·성화 형제가 쌀 1000석을 들여서 놓았다고 한다. 당시 안의현감 이성중이 들러 "어찌 오씨 가문이 번창하지 않겠는가"라고 칭찬하며 세운 설교사적비(設橋事蹟碑)도 있고 1910년과 1911년 세워진 오세안·오석규 공덕비도 있다. 고단함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놓은 데 대해 서울로 이어지는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도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쌀다리를 건너 용원정(龍源亭)이 있다. 용원정은 병항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구화공 오수 선생을 기리려고 후손이 세웠다. 앞에 착한 일을 했다는 오씨 집안 사람은 모두 이 오수 선생의 후예다. 둘레에 좋은 바위가 많다. 옛날에 이 길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쉼터였겠다. 여기서 북으로 가는 옛길은 사라졌다. 일부 남아 있으나 이어지지 않으니 소용없다.

 


- 말흘리
가야고분 등 가야시대 자취 남아

 

병항마을에서 옛 국도로 나와 3.7km 가량 달리면 마리면사무소 소재지 말흘리가 나온다. 말흘리에는 가야시대의 자취가 있다. 국도 3호선과 국도 37호선이 갈라지는 마리삼거리 오른쪽 언덕에 가야고분이 있다. 최근 발굴에서 접시·항아리·쇠도끼·화살촉 등이 나왔다. 북서쪽에는 창촌(倉村)이 있다. 창촌은 옛적에 안의현의 동창(東倉)이 있었기에 얻은 이름인데 여기 사람들은 '창말'이라 이른다.
마을 남쪽 200m 지점에는 커다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모퉁이에 장승이 있었기에 장승배기다리라 했다. 지금은 같은 마을 뒤쪽에 있던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11호)과 함께 거창박물관으로 옮겨가 있다.
고제 가는 길은 여기서 국도 3호선을 버리고 37호선을 따른다. 37호선은 경남 거창군과 경기도 파주시를 잇는다. 창촌에서 나와 북쪽으로 3.3km 가면 왼쪽에 학동마을이 나온다. 소나무로 이뤄진 마을숲도 있고 1640년(인조 18년) 옆에 있는 영승마을에서 옮겨와 마을을 연 전시언을 기리는 우수재도 있다.

 


- 영승마을
삼국시대 사신을 맞이하고 보냈다 하여 '영송'

 

영승(迎勝)마을은 매우 크다. 역사도 오래 됐다. 조선 초기 정선전씨가 가장 먼저 옮겨왔고 뒤이어 광주이씨, 선산김씨, 파평윤씨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됐다. 영승의 옛 이름은 '영송(迎送)'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여기서 맞이하고(迎) 보냈다(送)고 붙은 이름인데, 퇴계 이황이 1543년 '영승'이라 고쳤다.
개울가 영승숲이 멋지고 사락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사락(四樂)은 농사·누에치기·고기잡이·나무하기와 같은 농촌 마을의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영승숲은 전통 수구막이 노릇도 한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띠 모양을 이루고 있어 마을 앞쪽의 트임을 막아주는 것이다.
풍계(豊溪)마을은 북쪽 2.2km 되는 지점 오른쪽으로 위천과 당산천이 만나는 자리에 장풍숲과 함께 있다. 위천을 지르는 다리는 '장풍다리'라 했다. 옆에 주막도 있었으니 주막과 다리와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었다. 원래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1960년대 놓은 콘크리트 다리가 있다.
국도가 나면서 다리는 기능을 다했고 사람들만 걸어서 지나다닌다. 국도 위에 나 있는 새 다리에서 바라보는 옛 장풍다리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느낌이다.
서둘러야 하는 걸음이 아니라면 여기 즈음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되겠다. 하지만 여기에 민박이나 여관 따위가 없는지라 장소를 옮겨야 한다. 영승마을과 함께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수승대(搜勝臺)가 맞춤이다. 퇴계는 여기 이름도 수송(愁送)에서 '수승'으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