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화합과 절식의 전통음식 생채

이산저산구름 2013. 8. 19. 15:06



고려시대부터 즐겨 먹기 시작한 생채음식

우리 식食문화에서 채소나 나물을 식재료로 지금과 같은 생채음식이나 쌈음식류를 발달시킨 장본인은 고려 사람들이다.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이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했던 숭불崇佛정책으로 살생殺生이 금지되면서 생채음식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삼국시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중에 병사들이 음식을 싸서 먹는 음식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의 병사들이 어떤 식재료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생채음식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6세기, 초楚나라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중국의 『세시풍속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초나라에서는 정월 1월 1일부터 7일간 생야채만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려 사람들처럼 즐겨 먹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고려인들이 즐겨먹고, 고려의 생채음식 문화를 발달시킨 채소는 무엇이었을까. 순우리말로는 ‘부루’라고 하며, 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와거帛瞰’라고 불렀던 ‘상추’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의서醫書인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상추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입춘 절식이었던 생채음식

이후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날 것의 채소에 밥을 얹어 쌈으로 먹는 것을 복福을 먹는다는 의미로 ‘복쌈’이라 한다고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상추쌈이 생채음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상추외에도 숙주나물, 깻잎, 콩잎, 취나물, 미나리, 머위잎, 돌나물, 소루쟁이, 아주까리잎, 호박잎 등을 이용한 다양한 생채음식 요리법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쓴 세시풍속지『경도잡지京都雜志』나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경기도 여섯 지역(양주, 청평, 포천, 가평,삭령, 연천) 사람들은 입춘 날, 눈 밑에서 돋아난 움파, 새순, 산갓, 마늘,자총이, 당귀싹, 무릇, 달래, 부추 가운데 매운맛이 나면서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고 하얀색이 나는 다섯 가지 봄나물을 골라 입춘 날, 궁중에 진상하였는데 이를 오신반五辛盤혹은 오신채五辛菜, 진산채進山菜, 입춘채立春菜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조리법은 오신반을 겨자와 함께 무쳐 지금의 샐러드처럼 생채로 먹었으며, 그릇에 담을 때도 음양오행설을 따랐다. 모든 색의 중심을 상징하며 왕을 상징하는 황黃색 채소를 무쳐 한가운데 담고, 동서남북을 따라 신하들을 상징하는청靑·적赤·흑黑·백白의 사색나물을 배치하는 융합의 의미와 함께, 임금과 신하가 함께 나눠 먹음으로써 사색당파를 배제하고자했던 정치적 의미가 배어 있었던 생채음식이었다.

백성들도 궁중의 입춘 절식의 의미에 따라 오신채에 다른 채소를 섞은 채소요리를 이웃에 선물하거나 함께 나눠 먹는 춘반春盤이라는 입춘절식의 세시풍속을 통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채소요리 전문가까지 두었던 궁중의 생채음식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의 수라상에 올릴 생채음식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다양하게 전한다. 신선한 채소공급을위해 서울 뚝섬에‘농푸꼬지기’라는 일꾼을 별도로 두었거나, 궁중에서 필요한 채소를 기르는 내농포內農圃를 설치해 관리인을 두었으며, 수라간에 채증색菜蒸色이라는 채소요리 전문가 6명을 별도로 두었다.

수라상에 올리는 12첩 반상(찬품)에 숙채熟菜라 하여 채소를 익혀 조리한 반찬과 채소를 날것으로 조리한 반찬인 생채를 올렸는데, 대표적인 궁중의 생채요리로는 잡채雜菜, 수삼채소생채, 겨자채, 구절판, 도라지생채, 더덕생채, 무생채, 무굴생채, 죽순채, 삼색무생채, 미나리강회 등으로 조리법이 여간 복잡하고 섬세한 것이 아니어서, 채소 본질의 고유한 질감과 향을 조미료 등으로 무시하는 지금의 생채요리와는 다소비교된다. 죽순채는 죽순을 얇게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아서 데친숙주와 미나리, 볶은 쇠고기를 한데 넣어 새콤한 초간장으로 무쳐내는 것이 특징이고, 겨자채는 봄 갓의 씨를 가루 낸 후, 사발에 되직하게 개어서 한지로 덮어 부뚜막에 두었다가, 매워지기 시작하면 수저로 잘 저어서 매운맛을 충분히 낸 후, 생채와 익힌 고기, 해물을 겨자즙으로 무친 생채요리이다. 이 중에서, 잡채雜菜는 당면이 들어 간 지금의 잡채와는 형태가 다른 요리로, ‘잡雜’은 ‘섞다’, ‘모으다’라는 뜻이고,‘채菜’는 나물과 채소를 의미하여 여러 가지 채소를 섞은 생채음식을 말한다. 조선후기 음식조리서『음식디미방飮食디味方』에 잡채는 ‘살짝 데쳐 가늘게 찢은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나물에 오이, 무, 댓무, 참버섯,석이, 표고, 숙주나물을 날 것으로 썰어 넣고, 기름간장에 볶아 낸 후, 고명으로 후추나 생강을 뿌린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표적 궁중요리인 구절판九節板에도 신선한 생채가 반드시 들어간다. 재료의 특성에 따라 살짝 볶거나 데친 숙채나물이나, 쑥갓·홍당무생채·양배추 채 등의 생채를 빛깔을 맞추어 담았다. 조리법에 따른 맛에 있어서도 생채의 질감과 향을 살리기 위해감(甘: 단맛)·신(酸: 신맛)·고(苦: 쓴맛)·랄(辣: 매운맛)·함(咸: 짠맛)의 다섯 가지 맛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어떤 것을 먼저 사용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하여 둘 만큼 조선시대 궁중의 생채요리는 섬세하였다.

‘융합’과 ‘화합’의 의미가 깃든 생채음식

이렇듯 조선왕조의 궁중 생채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제철에 나는 신선한 생채재료만큼이나 궁중음식을 만드는 식재료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음식의 종류도 많았다. 맛내기에 있어서는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아 대부분이 담백한 맛을 내고, 밑간 역시 우리나라 전통 간장으로농도에 따라 진장, 중장, 청장으로 구분되는데, 나물과 채소의 특성이나 조리법에 따라 진장은 5년 이상, 중장은 3~4년, 청장은 1~2년정도 발효된 것을 쓰면서, 색과 염도를 조리법에 따라 달리 썼다. 더욱이 궁중의 입춘 절기 음식이었던 오신반五辛盤처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 27명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83세까지 살아 최장수왕으로 기록되었다. 이를 후대에 들어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세종대왕과 비교하면서 식사 때마다 신선한 생채(채소)를 즐겨 먹었던 식습관 때문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현대의 영양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신선한 채소 섭취는 무기질, 비타민, 철분, 칼슘 성분의 생리적 역할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해주고 있다. 우리 선조가 ‘상추’로 시작하여 만들어먹어 오기 시작한 생채음식은 단순히 찬품의 개념보다 더불어 헤아리고, 더불어 배려하고, 더불어 화합을 생각하게 하는 ‘맛’의 음식이기 전에 ‘융합의 음식’이었다.

글. 황영철 (푸드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