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아흔아홉칸 고택 강릉 선교장, 그 시간속으로의 여행

이산저산구름 2010. 2. 9. 11:02

 

아흔아홉칸 고택 강릉 선교장, 그 시간속으로의 여행

                                                                                                   유 금 숙
 



찬란한 오월이다.

나는 또 선교장을 찾는다. 십여 년 전 우연히 들렀다가 단번에 반해 버린 집. 안채 깊숙한 곳에 살고 있던 고택 안주인의 하얀 고무신을 담 너머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그 안주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고택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드는 손님들을 반긴다. 솔향기 그윽한 아흔아흡칸 고택 선교장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
멀리서 본 선교장 전경>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중요 민속자료 제 5호,1967.04.18 지정 )로 지정된 아흔아홉칸 고택이다. 전라도 지방에서 볍씨를 말릴 때 참새가 날아와 볍씨를 쪼아 먹으면 “강릉의 이통천댁에 가서 먹으라”고 좇아버릴 만큼 부자였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 만석꾼 집, 그 유명한 배다리 이통천댁이 바로 이곳 선교장이다.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집을 지을 때 족제비들이 집터를 잡아주었다고 전해지며 외부에서 이 집으로 들어 올 때 배를 엮어 만든 다리를 건너왔다 하여 선교장船橋莊 또는 배다리집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300여 년 동안 10대에 걸쳐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고택을 지키고 있는 이강백 관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둘째 형)의 18대손이다.



                   <맞은편 산에서 내려다본 선교장 전경>
 

선교장은 활래정, 외별당, 동별당, 안채, 서별당, 열화당, 행랑채등의 주 건물과 사무실, 체험관등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네모난 연못이 먼저 눈에 띈다. 우리조상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활래정 연못(땅)에 올봄에 부화한 원앙가족이 지금 한창 연잎 사이를 종종종 무리지어 오가고 있다. 연못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은 신선들이 사는 곳(하늘), 즉 우리들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활래정 정자는 인간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생각에 잠겨있는 형상(인간)이다. 그러니까 활래정에는 ‘천지인’ 사상이 모두 깃들어 있는 셈이다. 활래정은 정자와 온돌방으로 나눠져 여름에는 시원한 정자로, 봄부터 늦가을 까지는 따뜻한 온돌방으로 사용 할 수 있으며 특이한 것은 드물게 정자와 온돌방 사이에 다(茶)실이 따로 있어 귀한 손님이 오면 이곳에서 차를 달여 내 갔다고 한다.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과 매우 흡사하다.

 

연못을 지나면 월하문이 나온다. 월하문 왼편 기둥에는 ‘퇴고’의 유래가 되는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이라는 글귀가 씌여진 현판이 있는데 당나라 시인 가도가 쓴 4행으로 된 싯귀 중 두 행이 이곳에 걸려 있다.

 

활래정을 지나 고택 앞에 도착하면 특이하게 정면에 두 개의 문이 보인다.

왼쪽의 솟아있는 대문위에 ‘선교유거’仙嶠幽居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다. 솟을대문으로 남자들만 드나들던 남자들의 전용문이다.

오른편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이 평대문 또는 민대문이라고 하는 여자들 전용문이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집으로 이렇듯 대문이 나란히 있는 집은 우리나라 가옥구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평대문 옆으로 외별당이 보인다. 옛날에는 살림을 난 아들이 기거하거나 또는 첩실이 살던 공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18대 현손이 이곳에 거쳐하고 있다. 다른 고택들은 거의 비어있는 집이 많은데 반해 이곳은 현손이 거쳐하고 있어서 느낌이 좀 더 생생하다.

평대문을 들어서면 내외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안채의 프리이버시를 지켜주던 벽이라는데 왠지 나는 그 벽 앞에서면 적막하고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외벽을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바로 동별당이다. 집의 구조는 주인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한다. 동별당의 특징은 벽이 모두 문으로 되어있다. 더운 여름날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곧바로 시원한 정자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동별당. 주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엿 볼 수 있는 곳이다. 동별당 뒷문을 열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 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집을 지을 때 각도까지 세밀하게 맞췄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안채는 이 고택에서 가장 오래된 300년 된 집이다. 양통 겹집으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게 지어졌다.



<300년 된 안채모습,

17대 종부가 평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신 곳이다>
 

대청을 지나 건넌방이 바로 며느리 방이다. 17대 종부였던 성기희 여사가 인고(忍苦)의 삶으로 고택을 지켜가다가 바로 이 방에서 생을 마감 했다고 한다. 나는 이곳에 오면 늘 툇마루에 앉아 잠시 종부의 시름 깊었던 생전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기울어져 가는 종가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뒷담 쪽문을 걸어 나가 서울로 향하던 눈물겹던 뒷모습.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인고와 무언으로 지켜낸 고택. 그 종부의 눈물겨운 삶을 내 짧은 필력으로 어찌 다 전 할 수 있을까.

 

안채 옆 서별당은 아이들이 공부를 하던 서재이다. 또한 노마님이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노후를 보내던 곳이다. 아랫칸 연지당은 침모나 유모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선교장을 드나들던 수많은 객들로부터 안전하게 주인을 지키던 공간이다. 선교장엔 수많은 식객들이 드나들었는데 ?F게는 며칠, 길게는 반년 가까이 머물다 갔다고 한다. 어떤 손님은 너무 오래 머물러 이젠 좀 그만 떠나줬으면 싶은데 그렇다고 차마 면전에서 그만 가라고 할 수 없어 상차림을 다르게 해 (즉 반찬의 순서를 바꿔놓는 등)그들을 기분 상하지 않게 점잖게 떠나보냈다고 한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

-주인남자는 주로 여기서 머물며 수많은 손님을 접대하였다>
 

서별당을 나서면 열화당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남자 주인이 주로 머물며 업무도 보고 손님도 접대하던 사랑채다

열화당이라는 말은 도연명의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 라는 문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즉 친척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창덕궁의 낙선재와 구조가 비슷하고 궁궐을 본 따서 지었으며 주인은 수많은 손님들을 이곳에서 접대하며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한편 열화당의 약간 이질적으로 보이는 차양은, 이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러시아 공사의 답례선물이라고 한다.

 

선교장을 뭐니뭐니해도 장원으로써의 면모로 돋보이게 하는 곳이 바로 행랑채다. 입구에 서서 일직선으로 늘어선 행랑채를 바라보면 늘 감탄이 절로난다.

지금은 23칸에 불과 하지만 융성기때는 훨씬 더 많은 방들이 있었다고 한다. 행랑채에는 약방, 공방, 마굿간, 방앗간 등 모든 것들이 있어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불편함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방짜수저를 만들던 이가 있어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었는데 어느 날 왔을 때 그도 사라지고 없었다. 후일에 알았지만 그는 홀연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행랑채 공방 하나를 차지하고 열심히 놋쇠를 두드리던 장인도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열화당을 나가면 동진학교터가 있다. 많이 가진 만큼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집의 주인 이근우는 구한말 개화파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당시에 팽배하던 민족주의 교육사조 추세에 부응하여 1900년 동네 유지들과 더불어 동진학교를 설립 했다. 그는 이 학교를 통하여 강릉지방 청소년들에게 근대지식을 보급함은 물론 인재를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과 고향의 발전에 공헌하고자 하는 등 선각자의 뜻을 강하게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 년 만에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 학생유치의 어려움 때문에 폐교되었는데 그 때의 선생님 중 한분이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셨단다.

 

선교장에 들어설 때면 매번 언젠가 와 본 듯 익숙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이곳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드라마 ‘황진이’ ‘일지매’ ‘전설의 고향’ ‘궁’ 등을 촬영했고 영화 ‘식객’을 찍었다. 어느 순간 ‘송도교방’이 되고 ‘운암정’이 되기도 하는 곳. 그 다양한 변신만큼 선교장은 볼 때 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덧 선교장에 노을이 내린다. 나는 또 몇 번씩 뒤돌아보며 선교장을 나선다.

저녁햇살을 받으며 고요하게 서 있는 고택...

뒷산을 넘어가던 시간이 울창한 솔숲 나무 가지위로 가만히 비껴 앉는 걸 나는 등 뒤에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