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주왕산 계곡, 마음을 일깨우는 아름다움

이산저산구름 2010. 2. 24. 11:30

 

주왕산 계곡, 마음을 일깨우는 아름다움

                                               
               정 경 욱



  열심히 일한 당신! 나? 떠나? 토요 휴무가 되고 나서부터는 여행을 할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행의 설렘은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게 하고 듣게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종종 답사로 변한다. 특히 산행을 즐겨하는 우리 가족에게 답사는 땀 흘리며 그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된다. 이번에는 수달래가 붉게 피고 기암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주왕산 계곡이다.

 
        
<신라때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주왕산 계곡 입구의 대전사와 기암(奇巖)>
 

아스팔트길을 뒤로하고 흙길로 접어드니 사람을 압도하는 커다란 바위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다. 주왕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주왕산의 얼굴이다. 서유기에 나오는 부처님 손가락처럼 허공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거대한 바위는 부드러운 우리네 이웃의 손처럼 우리를 반기는 듯 보였다. 중학생이 된 현수에게 이 바위는 중생대 말 화산재가 쌓여 굳어진 후 융기하면서 침식이 일어나 생긴 바위라고 아는 체했다. 물론 나의 지식은 아니다. 주왕산 간다고 하니 지구과학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 나는 벌써 저 바위만큼이나 높아져 있었다. 기암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대전사(大典寺)로 들어갔다. 기암은 절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찍기를 즐겨하는 나의 가슴은 여지없이 흥분되었고 하나라도 더 많이 더 예쁘게 담으려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한참 후에야 카메라 창에서 눈을 떼었다. 이제야 절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절이다. 주왕의 아들 대전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라고 한다. 주왕은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으로 진(晋)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후주천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라로 숨어 들어와 저 바위 위에 진을 쳤다고 한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에게 이들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마장군 5형제를 보내 이들을 토벌했다. 그 후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속내를 알고 나니 저만치서 아름답게만 보이던 풍경이 이만큼 다가와 친근감마저 느껴진다.
 


                   
<계곡의 거대한 바위들이 거대한 병풍처럼 쳐있다>
 

대전사 옆으로 난 길로 빠져 나오니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아까 보았던 거대한 암봉(巖峰)인 장군봉과 금은광이로 가는 산길이고, 중간은 계곡 길로 명승이 될 만큼 절경을 자랑한다. 오른쪽은 계곡을 따라 주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까? 두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솟구치다 못해 한쪽으로 휘어진 선바위의 ‘쌍계입암(雙鷄立巖)’의 장관을 즐길 것인가? 아니면 된비알을 올라 단발령 고개에서 금강산을 조망하는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의 진경을 볼 것인가? 겸재의 그림에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 숲 속에서는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계곡을 따라 고개를 젖히고 쳐다봐야하는 기암의 장관은 잠시 접어두고 계곡 전체의 절경을 먼저 봐야겠다. 예상은 적중했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였다. 비온 뒤 멀리 보이던 앞산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처럼 계곡 전체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암봉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앞서 보았던 거대한 손가락같은 암봉은 거대한 회랑의 기둥이 되어 시야가 닿지 않을 만큼의 저쪽 멀리서부터 이쪽 끝까지 펼쳐 있다. 한 편의 거대한 바위 병풍이다. 석병산(石屛山)으로 불린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은 여기에 비하면 젓가락 같다고나 할까. 기암들이 펼쳐놓은 절경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조망. 누군가 지배자의 거만한 시선이라고 했다. 맞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뿌리에 대한 원시적인 인식이고 나란 존재에 대한 또 하나의 응시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장엄한 광경에 취해있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금방 정상이 나왔다. 7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도 벌써 정상이냐고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렀다. 평소 볼 수 없었던 장엄한 광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바라본 거대한 병풍바위 쪽으로 간 것 같다. 덕분에 정상에서 느긋하게 쉬었다.

 

한참을 쉰 후 후리매기 쪽으로 내려갔다. 후리매기. 묘한 말이다. 낯설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무슨 의미일까? 내려오는 내내 궁금했다. 체력이 소진되어 다리가 아프다. 무릎 보호대를 하고 스틱을 짚어도 아프다. 어떻게 탐방을 마무리 하지? 걱정이 된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계곡 길로 내려오니 장관이 펼쳐진다. 기암과 어우러져 처녀지에 쏟아지는 2단 폭포. 지금까지의 피로가 확 풀린다. 굵은 물줄기를 타고 내려온 물은 넓지 않은 소(沼)에 떨어져 포말을 만든다. 포말은 수면에서 연한 무지개를 만든다. 살포시 떨어지는 포말이 얼굴에 닿는다. 하얀 첫눈이 유리창에 얼굴을 비비듯 하얀 물방울들이 얼굴에 입맞춤 한다. 마음속까지 상쾌함이 스며든다. 모두 폭포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완만한 경사를 타고 내려오니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계곡 안쪽에 또 다른 폭포가 우리를 반긴다. 제 2폭포다. 위쪽 바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절구처럼 움푹 페인 바위에 고였다가 떨어진다. 아까 보았던 폭포와는 달리 아기자기하다. 근처에는 누가 쌓았는지도 모를 작은 돌탑이 모여 있다. 폭포처럼 나지막하게 쌓여있는 돌탑. 이름 모를 이들의 작은 소망이 말없이 서있다. 한 뼘 될까 말까한 작은 새 한 마리가 고요함을 참지 못해 허공에 파장을 일으키고 날아갔다. 고요하다.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가 이렇게 고요하니. 주왕 계곡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비경이다.

 

조금 더 내려오니 커다란 바위가 수직으로 절개된 듯한 협곡이 갑자기 나왔다. 깊은 계곡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발걸음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원시림 같은 협곡이다. 협곡에는 두 개의 바위 웅덩이를 돌고 다시 바위 허리를 타고 내린 계곡물이 좁은 암벽 틈을 헤치고 포말을 품어낸다. 온통 물보라다. 장관 중에서도 장관이다. 하염없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비경 중에서도 비경이다. 물방울이 얼굴에라도 닿을 량이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협곡의 장관에 넋이 빠져 한 동안 움직이질 못하자 아내가 소매를 이끈다. 또 한참을 내려가니 이번에는 촛대처럼 높이 솟은 암봉이 나왔다. 옛날 어떤 도사가 바위 위에서 도를 닦고 있는 데 신선이 와서 바위 밑에서 불을 지펴 연기가 바위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 모습이 떡을 찌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루봉이라 불린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주왕산의 ‘큰 바위 얼굴’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내는 엄지를 치켜든 것 같다고 ‘엄지 바위’라고 이름 지워 주었다. 몸짓에 불과하던 바위가 더욱 어여쁘게 되살아났다.

 

어느덧 햇살이 한 풀 꺾기고 시루봉에 잔잔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더 가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거대한 암봉들 사이에 연꽃 송이처럼 뭉긋한 연화봉(蓮花峰)이 보인다. 거대한 바위 병풍에 핀 한 송이 연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또 한 굽이 돌아가니 옛날 주나라 병사들이 물을 길러 올렸다는 30미터 정도의 깎아지른 절벽인 급수대가 나온다. 수직의 절벽이라 물을 긷는 우물과 비슷해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계곡 곳곳이 전시된 기암들로 한 편의 동양화를 만들어 낸다.

 

거의 다 내려오니 주왕암(周王庵)과 주왕굴이 나온다. 대전사와 더불어 주왕을 기리기 위해 의상대사가 세운 암자다. 주왕이 숨어살다 세수를 하기위해 굴 앞에 떨어지는 물을 받다 발각되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 피는 계곡을 물들였고 이듬해 주방천 계곡에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 꽃을 목숨이 끊어져 생긴 꽃이라고 수단화(壽斷花)라고 불렀다.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소쩍새와 많이 닮아 있다. 요사이는 예쁜 우리말 수달래로 부르고 5월이면 축제를 연다고 한다. 수직의 기암이 즐비한 거대한 병풍 계곡에 붉게 물들 수달래를 생각하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라보는 비경. 뻐근할 정도로 고개를 젖혀 바라보는 절경.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들어오는 황홀경. 그리고 풍성한 전설. 풍경이 아름다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주왕산 계곡 일대는 갖추고 있다. 어느 훌륭한 사람과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단순히 눈이 호사하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눈을 통해 마음까지 전달될 수 있는 그 어떤 아름다움. 그래서 주왕산 계곡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