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백두산 눈보라보다 매서운 겨울인가?"

이산저산구름 2008. 10. 6. 11:59

"백두산 눈보라보다 매서운 겨울인가?"

[배용한의 백두산 방문기]..."광풍이 몰아쳐도 멈출수 없는 민족 통일의 행군"

 ◇ 평양시내 개선문 앞에서 북측 안내원에게 '개선문'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방북단 일행
























 나는 이번이 일곱 번째 방북이고, 평양 방문은 네 번째이다.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평양근교 들판은 황금빛이었다. 기내에서 나누어준 노동신문에는 “가을걷이와 낟알 털기를 와닥닥 해제낌으로써 올해 농사를 빛나게 결속하여야 한다.”고 썼다. 가을이 이른 북녘 땅이다.

평양시내는 전과 많이 달라져 있다. 건물마다 새롭게 칠을 했고, 거리에 사람들도 밝아보였다. 양각도호텔 로비도 붐비고 있었다. 전등불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켜고 있었다. 밤에는 건물들 방마다 불을 밝혔다. 컴컴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 없다. 전등을 삼파장으로 대부분 바꾸었다. 안내 선생께 물어보니 전력 사정이 거의 회복된 단계라 했다. 수력발전소를 많이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안동 사람

곳곳에 외국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중국 사람들과 동남아에서 온 것 같아 보이는 사람, 또 검은 사람, 흰 사람들이 많이 보인 것도 전과 다른 모습이다. 호텔 마당에는 자동차가 즐비하다. 시내에도 차가 많이 다녔다. 이제는 개선문 도로 복판에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묘향산 다녀오는 길 가운데에서 그냥 놀 수 없다. 승용차들이 쌩쌩 달린다.

9월 23일 양각도호텔 로비에 들어서며 깜짝 놀랐다. 남녘에서 아는 얼굴을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대구 사람도 만났다. 이들은 20일 방북한 우리겨레서로돕기운동본부 방북단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24일 공식 일정이 끝난 밤, 한 잔 하기 위해 47층 회전식사칸(남쪽 사람들은 스카이라운지라 한다)에 올라갔을 때는 안동에서 가까이 지내는 신부님들을 만났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방북단이다. 우리보다 하루먼저 와서 하루 먼저 돌아갈 이들이다. 백두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안동에서 만났다면 별로 반갑지 않을 사람이라도 평양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것 같다. 이렇게 확 풀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호텔에서나 사적지에서나 길거리에서 북녘 사람도 만나고 남녘사람도 만나는 일이 일상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 양각도호텔에서 북쪽으로 본 평양...왼쪽 빨간 쌍둥이 건물이 고려호텔, 오른쪽 피라미드 건물이 고려호텔





















2005년, 6.15공동선언 발표 다섯 돌맞이 준비를 하며 결성된 기구가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이다. 민족공동위원회는 ‘북측위원회’, ‘남측위원회’, ‘해외측위원회’로 구성되어있다. 남측위원회는 노동자, 농민, 교사, 학자, 여성, 언론인, 예술인, 학생, 종교인 등 부문별 본부와 전국 시도에 있는 지역본부로 구성되어있다. 그 동안에 남북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종교인 등이 각각 모이는 상봉모임이 있었다. 그러나 남측위원회의 지역본부가 무슨 상봉모임 같은 것을 해본적은 없다.

내 기억으로는 그 때부터 남측위원회의 지역본부에서는 북쪽의 어떤 지역과 자매결연이나 그런 걸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지역본부의 대표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측위원회나 북측위원회를 가리지 않고 ‘지역 사업’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내가 대구경북의 대표이니 당연히 우리도 북의 어떤 지역과 교류 사업 같은 것을 폼 나게 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6.15북측위원회는 남측위원회 지역본부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부터 어렵다.

지난 8월, 6.15남측위원회 지역 대표자 회의에서 ‘지역 대표 130명 정도 대규모 방북을 추진하자’는 제안에 대하여 가능하면 -성과를 걱정하지 말고- 성사되도록 추진하라고 주문하면서도 6.15남측위원회의 대규모 방북이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번 방북단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실천을 위한 남측위원회지역본부 평양백두산 방문단”이다. 남쪽 정부는 애초에 6.15공동선언을 좋아하지 않는 정치집단인 것 같다. 그들은 그 선언이 있을 당시부터 못마땅해 했고, 그 뒤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가치를 깎아 내리기 위해 안달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때부터 6.15공동선언과 그 실천방안이라고 할 수 있는 10.4선언을 탐탁해하지 않는 속내를 보이곤 했다.

"이깔나무 숲 속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남녘에 사는 사람이 북녘 땅을 밟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방북 길도 한 번도 순조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 중에도 이번이 정세로 보아 가장 어려운 시기 같다. 이번 방북이 허가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찌되었든 출발일이 임박하여 방북이 결정되었다. 고려항공 180명이 탈 수 있는 비행기로 50명이 직항로를 통해서 평양으로 간 것이다. 비즈니스클래스 - 고려항공 승무원은 '업무칸'이라 했던 것 같다. 내가 비행기 넓은 자리에 앉아본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편한 여행은 아니었다.

양각도호텔에 든 것이 나는 세 번째이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평양은 여전하다. 동명왕릉, 만경대 고향집, 주체탑, 개선만,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 옥류관까지 내가 서너 번씩 가 보았던 곳이다. 길거리도 눈에 익다. 다들 반가운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26일 금요일에 백두산에 가기로 돼 있었다. 25일에는 비가 왔으나 이날은 갤 것 같았다. 평양에서 삼지연 공항까지는 한 시간 걸린다. 삼지연 공항에서 백두산까지 50킬로미터 거리를 버스로 간다. 1시간 20-30분쯤 걸린다고 했다. 삼지연 공항 날씨는 맑았다. 이깔나무 숲 속을 가는데 날씨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백두산 장군봉 아래 백두산 사적비 아주 가까운 곳까지 버스가 올라갈 수 있다. 좀 더 아래에서 향도봉과 장군봉 사이 안부까지 오르는 철길이 있다. 백두역, 사람들은 삭도라 했지만 쇠줄이 공중에 매달린 삭도는 아니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철길이 놓여 있고, 철길에 놓인 버스만한 차를 쇠줄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길에 눈이 쌓이고 있어 버스가 올라갈 수 없으니 철로로 올라가려고 백두역 마당에 버스를 세우고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눈보라가 심했다. 바람이 심하여 철길도 이용할 수 없어 걸어올라 가야 했다.
 ◇ 백두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눈보라에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내 기억 속의 백두산은 자유당정권 끝 무렵 내가 초등학교에 들었던 때 외던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우리의 맹세’ 마지막 구절의 백두산이 처음이다. 내가 사진으로라도 제대로 된 백두산 모습을 본 것이 1988년 한겨레를 통해서지 싶다. 그 시절 백두산 사진을 교실에 붙였다가 잡혀가 고초를 격은 교사도 있었다. 일본 사진작가 ‘구보타 히로지’가 찍은 사진을 본 뒤로 이제까지 뇌리에서 백두산이 떠난 적이 없었다.

꿈속의 백두산을 내가 2003년 여름 맑은 날 생시에 장군봉에 올랐었다. 작년에는 만주로 에둘러 천지 서쪽 능선을 쾌청한 날씨에 하루 종일 걸었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눈이 시리다. 다른 사람이 찍은 백두산 사진도 많이 보았다. 언제라도 눈만 감으면 눈에 아련거리는 모습이 백두산이다. 2008년 9월 26일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지만, 나는 향도봉, 장군봉, 천지 건너 청석봉, 백운봉, 천문봉도 본다.

백두산에서 떠오른 '고난의 행군'

남녘에서는 유난히 더운 9월이었다. 평양으로 오는 날도 가벼운 양복 안에는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었었다. 따로 준비한 옷은 등산용 외피 한 장뿐이어서 양복바지 안에 여름 등산 바지를 껴입었다. 와이셔츠 안에 티셔츠를 껴입고 여름 양복 위에 등산용 외피를 덮어 입고 있었다. 장갑은 없다.

비탈을 오르느라 그리 추운 줄은 몰랐으나 노출된 살갗은 한 겨울 추위를 느꼈다. 눈바람이 불 때는 난간을 잡고 몸을 돌려 서있어야 한다. 자칫 바람에 날려 산비탈에 쳐 박힐 것만 같다. 철길이 끝나는 곳에 향도역이 있다. 오른쪽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글발이 박혀있는 향도봉이고, 왼쪽에 장군봉이 있을 것이다. 비루봉이 손에 잡힐 듯 할 것이다.

몇 걸음 앞에는 쇠사슬 난간이 있고 그 너머에 천지가 보일 것이다. “저쪽이 천지이니 그기에 서시오 사진을 찍어 드릴게요.”하고 사진을 찍으려 하였으나 그 곳에 바로 설 수도 없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도 자기 몸 가누기가 어렵다.

백두산사적비가 바로 보일 것이지만 눈보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등지고 몇 사람이 그 쪽으로 향했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싸락눈이다. 얼굴에 맞는 눈은 모래를 뿌리는 것 같다. 몇 사람씩 팔짱을 끼고 자세를 낮추어 움직여야 했다. 사적비를 방패삼아 사진을 찍어보았으나 정신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웬만하면 장군봉 꼭대기에 오르려 할 것이나 내가 손을 들어 “바로 저기가 장군봉입니다”하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백두역까지 내려오는 길은 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버스길을 택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몸을 돌려 섰다가 좀 잦아지는 듯해야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악천후 속에서 걷는 거리가 약간이 아니다.

9월이라 기온이 그리 낮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지만, 가져간 물병에 물이 얼었다고 했다. 사진을 찍느라 내 놓은 손가락이 얼얼했다. 내려와 버스 안에서 손가락이 언 것 같아서 주물러주곤 했는데, 닷새가 지나서까지 오른손 엄지손가락 끝은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아직 남아있다.

내가 세 번째 백두산에 올라 이번에야 그 진수를 보았노라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백두산의 본모습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을 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겠으나 ‘고난의 행군’이 생각났다. 1939년 1월이었을 것이다. 기온은 영하 30도에서 40도, 헐벗고, 굶주리고 적은 무리지어 쫓아오고, 항일무장독립투쟁 때의 그 ‘고난의 행군’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을까?

서울에 돌아오니 나는 여름에서 갑자기 겨울로 갔다가 가을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지난 8월에 지리산을 다녀와 등산기 제목을 “빨치산 체험”이라고 붙였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방북기의 제목을 감히 ‘고난의 행군 체험’이라고 붙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함을 아직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양각도호텔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본 평양시내...바로 앞 건물이 '국립영화제작소'. 그 옆은 축구경기장





















남녘 사람이 북에 가면 남녘에서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이 안 보던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나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림 한 점을 가져오고 싶다.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나는 북의 학생들에게는 수학을 어떻게 가르칠까 궁금하기도 하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 학생들의 수학 문제집 몇 권을 가져온 적이 있다. 나는 북녘 동포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남녘에는 국가보안법이 다시 살아나 맹위를 떨치고 있다.

북에서 가져와서는 안 되는 물건이 많다. 아니,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2005년 많은 사람이 보고 온 ‘아리랑’공연을 보는 것도 이번에는 안 된다고 했다. 돌아올 준비를 하며 사람들은 가방을 뒤져 혹시 국가보안법 상 문제가 될 만한 물건은 없는가 살펴야 했다. 주머니도 뒤지고, 카메라도 꺼내서 스스로 검열을 해야 했다.

"눈보라 광풍이 몰아치더라도..."

돌아오는 길 평양공항에서 또 한 무리의 방북단을 만났다. 그들에게 흘러들어온 서울 소식은 또 어떤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서늘한 소식이었다. 서울에는 백두산의 눈보라보다 더 매서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말일까? 아니나 다를까 김포공항에서 짐을 찾는데 직원의 무전기에서 “지금 나오는 사람들의 그림을 검사하라”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우리 중 몇 사람의 짐은 샅샅이 뒤짐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무사히 다녀왔다. 금강산 사태이후 막혀있던 방북길이 20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방북했고, 22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방북 길에 올랐다. 지원단체가 아닌 6.15남측위원회 지역본부가 북녘을 다녀온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남측위원회 지역본부 대표가 북측위원회 대표를 만나서 이후에 정기적인 만남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 6.15민족공동위원회 사업에서만 아니라 민족통일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할 수 있겠다. 강고한 정세에 민족통일 운동이 지역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을 둘러싼 정세가 결코 녹녹치 않다. 이 땅은 아직도 자유당정권 시절 어린 내가 외던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북진통일의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보라 광풍이 휘몰아치더라도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발걸음은 결코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 항일무장투쟁 당시 백두산 '밀영(비밀아지트)'...(왼쪽부터) 배용한. 김선우(대경진보연대 사무국장). 북측 해설사. 정우달(민주노총대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