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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조선력사" 교과서 이야기 2

이산저산구름 2006. 11. 8. 08:27
북녘의 “조선력사” 교과서 이야기 ②
겨레하나 2006-11-07    조회수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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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이 위치한 대박산 전경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강동면 문흥리라는 곳에 가면 ‘대박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북녘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다. ‘조선력사’ 교과서 제2과는 “조선민족의 첫 나라를 세운 단군”이다. 우리는 이미 이전에 강동에 전해오는 단군전설을 통해 어릴 때의 단군과 기린마에 얽힌 이야기는 알고 있거니와, 오늘은 역사 교과서에 담긴 단군조선의 역사가 어떤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나 살펴보자.

  이 내용에 의하면, 단군은 평양 부근에 있는 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지혜가 뛰어났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마치 성경에서 어린 예수를 일컬어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장 52절)는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단군의 어릴 때 모습은 김일성을 연상케 하는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뜻하는 것으로, 그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단군은 일찍부터 이 땅에 나라를 세울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말타기와 칼쓰기 및 활쏘기 등 무술을 련마하고 지혜를 키워 나갔”다. 그런 후 “높고낮은 여러 관리들을 뽑고 법과 군대도 내고” “사람이 살기 좋고 외적을 물리치는데도 유리한 평양에 성을 쌓고 궁궐과 건물들을 지어 나라의 수도로 꾸리였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을 때 “세계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고 북녘의 교과서는 말하고 있다.

만주벌판 너머로 백두산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잠깐, 많은 학자들이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가지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 이곳 평양이든 혹은 또 다른 고조선 건국지로 알려진 요하 부근이든 백두산 부근 모두에서 ‘궁궐’이라고 할 만한 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발상지는 도대체 어디일까? 본인은 이전에 이미 말한 것처럼, 장안 부근이 아닐까 보지만......


위로부터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본인이 보기에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중국의 종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원 종족은 ‘화하족’으로, 이는 기원전 약 2050년경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나라 하(夏)왕조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이전까지는 중국에 국가라고 할 만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종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전 언젠가 중국의 시조 황제는 오늘날의 북경 부근에서 동이족인 치우천왕과 격렬한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때 결정적으로 중국 종족과 한민족이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의 시조 황제는 오행사상에 의하면 ‘黃熊’으로 불리며, 나머지 ‘청룡’,‘백호’,‘주작’, ‘현무’를 사방으로 하여, 항상 중국의 중심에 놓인다.
  그런데 황제의 상징, 그래서 오늘날에도 중국의 상징이 ‘곰’이라는 것은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라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熊族의 족장인 웅녀와 결혼하여 신시를 형성했다. 이때, 웅족은 왕족이 된 것이다. 황제는 바로 이 웅족의 후손으로 그 세력이 커지면서 환웅과 독립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녘의 “단군전설”에서 환웅을 ‘박달씨족 족장’이라 부르고 ‘神市’를 ‘박달씨족 국가’라 불렀던 것을 상기해 보면 이는 다시 황제와 연관된다. 황제는 본래 ‘皇帝’라 불렸는데, 진시왕이 자신을 황제라 부르면서, 皇帝를 黃帝로 바꾸었다고 한다. 어쨌든 여기서 ‘皇’자를 풀어 쓰면 ‘白王’으로, 이를 한글로 해석하면 해,빛,밝음 등으로 상징되는 ‘박달국왕’ 및 신과 같은 뜻이 된다. 그래서 환웅은 환인의 아들로 天王이라고도 불리며, 황제 또한 중국에서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