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맞으며 영월과의 첫 인사
극성맞은 한여름의 재촉에 못 이겨 여행길에 나서긴 했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유명 해수욕장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일상보다 더 치열해 보이는 쉼의 현장은 갑절 이상으로 심신을 괴롭힌다. 영월은 그런 바쁜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우리들의 유배지로 제격이다. 녹음(綠陰)이 짙어질수록 거침없는 물살의 맛을 보겠다며 영월의 동강을 찾는 래프팅족들이 있지만, 비움을 위해 길 떠난 사람에겐 한없이 조용하고 느린 서쪽의 평창강이 맞춤형이다. 태백산맥의 준령인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 유역은 1,000m가 넘는 산악들로 둘러싸여 있어 깊고 또 깊다. 산세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굽어보고 싶어, 패러글라이딩 명소인 영월 장암산의 활공장 위에 섰다. 평창강 줄기와 산들 사이에 아늑하게 움을 튼 평창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른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강줄기와 산등성이가 만들어낸 원시적인 풍경에 뜻 모를 안식을 얻는다. 평창강의 속내가 더욱 궁금해져 괜스레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신선이 되어 마음을 먼저 뉘일 곳
천연기념물 제543호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평창강에 시간을 맡기고 유속의 흐름대로 길을 걷는다. 맑은 물빛과 어우러진 기암괴석의 자태에 과객의 발걸음은 평창강보다 한 템포 느릿해진다. 수많은 기암괴석 중에서도 천연기념물 제543호 영월 무릉리 요선암은 시공간의 초월을 느낄 만큼 신비로운 풍광을 완성한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을 지닌 요선암(邀仙岩)은 조선시대 문예가 봉래 양사언이 평창 군수 시절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너럭바위 위에 ‘요선암’이라 새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요선암에 산재해 있는 기이한 돌개구멍은 마치 수천 년 전 일렁이던 물살이 일시에 멈춰 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한다. 움푹움푹 깊이 패인 항아리 모양의 구멍들이 물살의 찰랑거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은 암반의 오목한 부분에 자갈이나 모래 등이 들어가 물살과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암반을 더욱 마모시켜 만든 구멍들이다. 단단한 화강암반을 가지고 이토록 유려한 곡선을 만들기까지 물살은 수백 번, 수천 번이 넘게 다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억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요선암에서 신선이 되어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요선암에 앉아 돌개구멍 하나를 들여다보며 우리네 삶에서 매일 깎고 다듬어 깊이를 더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젖는다. 그때 코끝을 스치는 푸른 솔 내음. 아마도 요선암에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요선정으로 안내하기 위한 오솔길의 부름일지라. 본래 법흥사에 딸려 있던 작은 암자가 있던 곳에 자리한 요선정은 1915년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됐다. 요선정 안에는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숙종의 어제시를 영조가 다시 쓴 것과 정조 어제시의 편액이 걸려있다. 이외에도 요선정 바로 앞에 놓인 커다란 바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으며, 좌상 뒤편으로 보이는 절벽의 풍경은 주천강과 법흥계곡의 물줄기이다. 절벽 끝자락에 기세 좋게 뻗어난 한 그루의 소나무는 화룡점정의 역할을 해낸다.
외딴 섬과 같았던 단종의 유배지
명승 제50호 영월 청령포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유배길을 오른 단종. 유배행렬을 걷던 단종이 유독 험준한 고개를 넘으며 금부도사 왕반연에게 고개의 이름을 묻자,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이제부터는 군등치(君登峙)라고 하옵지요”라고 답하여 고개는 ‘군등치’란 이름을 얻게 됐다. 어렵사리 고개를 넘어 청령포에 도착한 단종은 이 곳에서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청령포는 3면이 선돌강으로 둘려싸여 있어 나룻배 없이는 출입이 전무했고 서쪽에 육육봉이라 불리는 절벽이 솟아 있어 지형 자체만으로도 단종을 더욱 외롭게 했으리라. 지금은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단 몇 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왕래가 쉬워졌다.
현재 청령포에 가면 단종이 기거했던 단종어소가 있으며, 이곳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담장 밖 소나무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도록 한 세조의 엄명에도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한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있어 이름 또한 ‘엄흥도소나무’이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되는 소나무, 관음송(觀音松)이 있다. 3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소나무이며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운 작품들
명승 제75호 영월 한반도 지형·명승 제76호 영월 선돌
인간의 초인적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의 명작 앞에서 가슴 벅찬 먹먹함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자연이 만든 웅장한 작품들 앞에서는 ‘감흥’이라 부르기에 한없이 모자란 ‘숭고함’이 전해져 온다. 평창강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영월의 한반도 지형 또한 신비로움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하천의 침식과 퇴적 등의 반복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 절벽은 백두대간을, 왼쪽의 작은 모래사장은 서해를 연상하게 해 한반도를 꼭 빼닮았다.
현재 이곳에는 한반도 지형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예스런 ‘뗏목’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줄배 체험, 섶다리 건너기, 미니 뗏목 만들기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이 운영되고 있어 영월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별한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한반도 지형을 걷다 보면 청초한 아름다움의 야생화와 다양한 수목을 만나는 행복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하나의 기이한 풍경을 가진 명승지 ‘선돌’도 빼놓지 말자.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거구의 장수가 단칼로 절벽을 쪼갠 듯한 선돌의 형상이 ‘신선암’이라 불리는 이유를 가늠케 한다. 약 70m 정도의 선돌 또한 단종이 유배 가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며 우뚝 서 있는 기암의 모습이 신선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선돌과 평창강이 이루는 절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글‧최용미 사진‧안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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